대학생 시절에는 아르바이트비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다 보니 옷에 투자할 돈은 늘 부족했습니다. 가뭄에 콩이 나듯 쇼핑을 했고, 목욕탕 캐비닛보다 조금 더 큰 옷장에 든 옷이 전부였습니다. 실은 가진 모든 옷을 넣고도 공간이 남아서 남는 공간에 시리얼이나 컵라면 같은 비상식량을 잔뜩 보관했더랬습니다.
옷이 몇 벌 없어서 행색이 추레했느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몇 벌 안 되는 옷가지로 최대한의 조합을 만들어 다양하게 입었습니다. 상의, 하의, 겉옷이 각각 5벌씩 있다 했을 때 이것으로 만들 수 있는 조합은 125가지나 되지요. 여기에 신발과 가방이 각각 3개씩 있다고 하면 9가지 경우의 수가 생기고 이를 옷 조합의 경우의 수인 125에 곱하면 어림해서 1000가지 이상의 조합이 됩니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 반절을 쳐내도 500까지 조합으로 코디가 가능했네요. 하고자 하는 말은 목욕탕 캐비닛보다 조금 더 컸던 옷장에 든 옷으로도 부족함이 없었다는 겁니다.
지금은 옷 방이 가득 차도록 옷이 많습니다. 너무 많아서 몇 벌 인지도 모릅니다. 방이 가득 차서 주기적으로 버립니다. 그러면서도 툭하면 쇼핑을 가서 또 옷을 삽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옷의 종류가 너무 많다 보니 인덱스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거의 똑같은 옷을 또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략 상의, 하의, 겉옷이 각각 50벌씩 있다고 가정하면 이것으로 만들 수 있는 조합은 125000가지가 됩니다. 거기에 신발 20켤레, 가방 10개, 시계 10개를 경우의 수로 대입하면 250000000개의 조합이 나옵니다. 거기에 안경, 선글라스, 반지, 넥타이 등의 액세서리도 여러 개씩 있지만 쓸데없는 계산은 이제 그만하렵니다.
그래서 패셔니스타가 되었냐고요? 그럴 리가요.. 오히려 너무 많으니 뭘 입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늘 입던 옷을 입거나, 말도 안 되는 조합으로 옷을 입게 됩니다. 상의, 하의, 겉옷이 각각 5벌씩 있을 때 이 옷들의 조합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그중 오늘의 날씨와 기분에 어울리는 옷을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250000000개의 조합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중 어울리는 조합을 찾아내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옷뿐만이 아닙니다. 핸드폰 사진첩에는 사진이 너무 많고, 책장에는 책이 너무 많고, 냉장고에는 음식이 너무 많고, 특히 냉동실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이 너무 많습니다. 서랍마다 잡동사니로 가득하고, 차 수납함에는 차량 용품이 가득합니다. 창고에는 각종 캠핑용품, 각종 공, 각종 라켓, 각종 악기, 각종 탈것, 각종 보드게임, 각종 콘솔 게임기와 타이틀이 쌓여있습니다.
그래서 삶이 풍요로워졌냐고요? 그럴 리가요..
텔레비전을 켜면 예전에는 kbs, mbc, sbs 3개 채널로도 하루를 재미있게 보냈는데, 지금은 가입된 ott만 6개입니다. 그뿐인가요? 유튜브에 구독한 채널만 해도 수십 개이고, 틈틈이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도 살펴봐야 합니다. 부동산 카페와 호갱노노에 올라오는 글도 수시로 체크해야 합니다. 매달 따박따박 리디북스와 멜론에도 구독료를 상납하고 있습니다. 브런치에도 가입을 해버려서 주말 아침부터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오랫동안 글을 안 쓰면 독촉 알람이 옵니다!!)
그래서 삶이 더 즐거워졌냐고요? 그럴 리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