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죽게 된다는 사실을 처음 인지했던 꼬마는 무서움에 눈물이 났다.
어린 꼬마에게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홀로 집을 지키는 꼬마의 시간은 더 느리게 흐른다. 그러니 일을 마치고 돌아올 엄마를 기다리는 것이 그다지 위안이 되지 않는다.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을 상상한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상상을 뿌리칠 수 없다. 땅에 묻힌 할아버지를 떠올려 본다. 갑갑한 관속의 춥고 어두운 장면과 결국은 사라져 버리고 이 세상 누구도 나라는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 채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상 풍경까지 이어진다.
길고 긴 시간이 흘러 해가지고 엄마가 집에 왔다. 오자마자 엄마 품에 안겨 꺼이꺼이 울었다. 엄마가 죽는 게 무섭다고, 또 내가 죽는 게 무섭다고, 어른들은 무섭지 않냐고 칭얼거리며 왜 엄마는 나를 낳아서 이렇게 무섭게 하냐며 투정도 부렸다.
엄마는 평온했다. 다 죽는 건데 뭐가 무섭냐고 잠드는 거랑 똑같다고 위로했다.
꼬마는 그날의 엄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졌다. 죽음과의 거리가 줄어들어 꼬마 시절보다 더 무서운 상황임이 분명한데, 무섭지가 않다. 삶에 대한 애착이 줄어든 것인가? 겸허히 받아들인 건가? 눈앞에 산재한 걱정 덩이들이 가로막고 있어 그 너머에 있는 죽음이 보이지 않는 것인가? 엄마도 그랬었나 보다. 그래서 그렇게 평온할 수 있었나 보다.
결국 우리는 같은 곳으로 가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한 친구는 그곳에 먼저 갔다. 애도의 눈물을 흘렸고, 눈물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그 순간을 맞이 했을지 여한이 남지는 않았을지 마음이 쓰였다. 얼마 전 통화에서 어머니가 집에 자주 좀 오라며,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니 그전에 그리운 사람들 많이 만나고 싶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두려움도 회한도 느껴지지 않았다. 덤덤한 말투로 오로지 내 얼굴을 보고 싶으시다는 마음만이 담겨 있었다. 나이가 들어 홀로 집에 남겨진 어머니의 시간은 꼬마 시절의 나처럼 느리게 흐르는지 얼마 전 명절에 찾아뵈었다 싶은데, 어머니에게는 명절이 '얼마 전'이 아닌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