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소룡 근육을 장착한 남자

by 바보

주말 내도록 초미세먼지가 매우 나쁨이어서 집안에서만 지내다가 월요일 아침에 미세먼지가 반짝 좋아졌길래 출근 전 사우나에 들렀다. 누군가는 목욕탕이랑 미세먼지 농도가 무슨 관계냐 하겠지만, 야외탕에서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은 나로선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평일 아침에는 목욕탕 이용료를 2000원 할인해준다. 그럼에도 이 시간에 목욕탕을 찾는 손님은 많지 않다. 새벽에 오는 손님들의 나잇대는 무척 높아서 이 시간에 가면 나만큼 피부가 탱탱하고 머리숱이 많은 남자를 좀처럼 볼 수 없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닌듯한 느낌을 받는다. (대학로나 만화방에서는 반대의 이유로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렇다. 나는 아직도 만화를 좋아한다..)


그런데 오늘은 나보다 탱탱한 남자를 셋이나 발견했다. 이 셋은 도대체 이 시간에 왜 야외탕에 앉아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아침인 데다 야외탕은 소용돌이치는 김으로 가득 차 있어서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탱탱한 남자들의 균형 잡힌 몸매는 어둠 속에서도 도드라졌다. 나는 그들의 정체가 너무 궁금해져서 아닌 척하며 귀를 기울였다.


이소룡 근육을 가진 분은 목소리나 말투에서 나이가 느껴졌다. 대화 내용을 듣다 보니 이소룡 근육의 아저씨는 나머지 굵은 근육을 가진 두 남자의 아버지였다.


아들들은 30대 초반 즈음으로 예상되며 세 남자는 모두 목욕탕 인근 공단의 서로 다른 회사에서 일하는 듯했다. 저렇게 큰 아들이 있으면 적어도 50대 후반은 됐을 텐데 이소룡 근육이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하던 찰나, 큰 아들이 내 생각을 대변하듯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배가 하나도 안 나왔어요, 아버지 관리하세요?"

"모르냐? 아부지 맨날 윗몸일으키기랑 푸시업을 50개씩 하잖냐. 24년째 하루도 안 빠지고 하는데 배가 나오겠냐."

아! 꾸준함이란 이런 거구나!


세 부자는 탕을 옮겼고, 나는 오해(?) 하지 않도록 시간차를 두고 따라 옮겼다. 그동안 화제가 바뀌어 있었다.

"형, 우리 회사 부장님이 밤마다 불러내서 죽겠어. 회사에 무슨 일 터졌나 싶어서 나가보면 맨날 이상한 소리만 해. 어제는 6개월 동안 연락두절이던 아들한테서 갑자기 전화가 왔는데, 다짜고짜 돈 100만 원을 보내 달랬대. 어디에 쓸 거냐고 물었더니 일본 가는 비행기가 싼 게 나왔다며 일본 여행 간다 해서 안 줬대. 좋은 아빠 노릇 해보려고 웬만하면 줄랬는데 일본 여행이 이 시국에 말이 되냐면서, 어이없게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이런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냐고!"

"집에 가면 아무도 자기 말을 안 들어주니까 회사 부하직원 붙잡고라도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꼰대라도 근원적인 외로움은 있으니까. 가만 보면 우리 집처럼 화목한 집이 없더라."

"아 그러면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면 되지, 왜 나한테 술을 억지로 먹이는 거야? 이해할 수가 없네!"

"자기 권력을 확인하는 거지. 억지로 술을 먹이면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거야."

"그 부장님, 집에 가면 개만 반가워한대. 그 말 듣는데 좀 짠하더라."

아! 꼰대도 외로움에서 자유할 수 없구나! 오히려 자기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어서 더 꼰대 짓을 하는 것이로구나!


부자는 습식 사우나로 자리를 옮겼고 나는 다시 한번 오해(?) 하지 않도록 시차를 두고 따라 들어갔다. 사우나에는 노란 조명이 있어서 이소룡 근육을 장착한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아버지 얼굴에 나이의 흔적은 있었지만 그 표정이 무척 온화했다. (반면 우리 사장님은 항상 화나 있는 미간의 주름과 불만을 잔뜩 품고 튀어나온 입술 모양새 때문에 온화함이란 찾아볼 수 없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길게 하셨는데 아들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의 말씀을 경청했다. 내용은 주시경 선생님, 방정환 선생님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고, 요지는 분명한 뜻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야 나이 들어서 허무하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는 학식과 교양이 무척 풍부하신 듯하여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일지 궁금했는데, 신기하게도 또 내 마음을 아는 듯한 대화가 이어졌다.


"아부지 트럭이 25만 킬로를 달려서 이제 차를 바꿀 때가 됐어. 어제는 그동안 기름을 얼마나 썼나 찬찬히 계산을 해봤거든. 평균 연비가 9쯤 되고 기름값이 1300원쯤 하는데 어떻게 계산하면 되겠냐?"

"25만 킬로를 9로 나누고 1300 곱하면 3000만 원쯤 되겠네?"

작은 아들은 반말을 했다. 대화의 분위기 때문인지 반말이 예의 없어 보이기보다 부자간의 친근함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저렇게 어려운 계산을 암산으로 뚝딱 풀어내는 작은 아들이 무척 똑똑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빠가 계산기를 두드려봤더니 기름값만 3600만 원 이잖냐. 이 차가 네 번째 차니까 자그마치 1억 4천500만 원어치 달린 거야. 아빠가 맨날 좁은 차에만 앉아있으니까 산에 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면 그렇게 기분이 좋아. 그래서 아빠가 쉬는 날만 되면 산에 가는 거야."

"아빠 진짜 대단하다. 24년간 한 직장에서 일하는 게 보통일이 아닌데. 와 진짜 존경해 아빠."

이소룡 근육의 아버지는 멋진 잔근육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아들의 진심 어린 존경을 받고 있으니 훨씬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저씨는 비록 일생의 대부분을 좁은 트럭에서 보내셨지만 인생을 정말 잘 사신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 줄 요약

1. 이소룡 근육의 비결은 꾸준함이다.

2. 나이 들어 외롭지 않으려면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3. 이미 늦었다 싶으면 개라도 키우자.

4. 나이가 들면 얼굴에서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보인다.

keyword
이전 08화칭찬에 목마른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