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msnghwn Jan 05. 2017

불행이라는 이름의 비, 그 공포에 대하여

영화 <곡성(哭聲)>

2016년 5월 17일 새벽, 한 여성이 화장실로 향했다. 오래지 않아 화장실은 아수라장이 됐다. 살인사건이었다. 가해자는 현장에서 바로 검거됐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무수한 논란이 있었지만,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장 한(恨)스러운 것은 '왜 하필 나여야만 했는지'일 것이다. 그날 그곳의 무수한 사람들 중 살해당한 단 한사람. 그 한사람은 어떻게, 왜 그런 불행을 당해야만 했을까.


출처-daum영화


<곡성>은 굉장히 독특한 영화로 관객들에게 기억된다. 그건 아마도 '영화 내내 지속되던 알 수 없는 공포와 불길함'을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관객이 지속적으로 느낀 그 공포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공포의 근원은 <곡성>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지닌 무논리성에 있다.

<곡성>의 시발점이 되는 질문, '왜 종구의 딸이 그런 불행을 겪어야만 했는지'가 명확히 설명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미 영화 전체는 인과적인 논리를 벗어나 있다. 왜 종구의 딸이 비극의 대상이 됐는지에 대해 일광은 "미끼를 물어버린 것이여"라고 답할 뿐이다. 낚시를 할 때 무엇이 걸릴 지 알고 낚시를 하는 낚시꾼은 없다. 그저 불행은 낚싯대에 매달려 사회에 던져졌을 뿐이고, 이 불행을 무는 것은 '누구나'다. '왜 하필 그 사람이 비극의 대상인가요?'에 대한 답은 '이유 없음'인 셈이다. 결국 <곡성>은 피해자가 선택된 배경엔 어떠한 논리와 상식도 없음을 보여줌으로서, '너도 이 비극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공포를 불어넣었다.


출처-daum영화


이런 공포는 '강남역 살인사건'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의 피해자가 가장 한스러워 할 질문, '왜 하필 나였는지'에 대한 <곡성> 나름의 대답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희생당하는 데 그렇게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는 걸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결국 <곡성>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피해자들이 겪어야 했던 불행에 대한 위로라고 봤다. 불행을 미리 알면 막을 수 있었을까? 그건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비가 내리면 옷이 젖게 되듯 누군가의 불행도 그냥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불행에 대해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지만 피해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위로하기 위해,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곡성>의 나홍진 감독이 한 잡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결국 불행이란 피해자 당신의 잘못이나, 어떤 타당한 이유로 인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냥' 벌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든 이해하기 위해 온갖 이유를 만들어낸다.

"그 사람이 사이코패스였대"

"그 여자가 꼬리를 친거래"

"당할만 하니까 그랬겠지"

이런 이유들은 '그러니까 나는 그런 불행을 겪을 리 없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를 통해 사건의 공포를 떨쳐낼 수 있는 것이다. 사건의 공포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더이상 그 사건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사건의 해결과 예방에 대한 논의는 어려워진다. 결과적으로 피해자도, 남겨진 우리들도 더욱 불행해지는 셈이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바다로 가라앉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슬퍼했고, 분노했으며 공포에 떨었다.

'나였을 수도 있다' '내 자식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겪은 불행의 크기는 결코 짐작할 수 없지만, 함께 공포를 느끼고 분노함으로서 그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공포라는 감정을 공유하고 나 역시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연대한다면, 다가올 불행을 조금이라도 걷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출처-daum영화





**나홍진 감독 인터뷰(출처: 씨네21) 링크-http://m.cine21.com/news/view/?mag_id=84127 


매거진의 이전글 너의 또 다른 이름은 운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