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그 무엇보다 ‘無相(무상)’한 방식으로
위 영상은 AI 입니다
꽃은 무성하되 침묵하고,
얼굴은 또렷하되 흐른다.
이 장면은 시각이 아닌 ‘지각’의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응시는 단호하지만, 말이 없다.
그 침묵은 우리를 관조의 자리로 이끈다.
물고기는 유영하고, 인물은 고요하다.
그러나 진정 살아 있는 것은 누구인가.
정지는 죽음이 아니며,
움직임은 곧 허상일 수 있다.
고요 속에서 파열음을 내는 듯한 이 병치는
삶과 비삶의 윤곽을 허문다.
이 화면은 실재와 환영의 경계를 제거한다.
그녀는 꽃이 아니며, 인간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 —
이것은 꾸며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난 ‘묘유(妙有)’이다.
얼굴은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응시는 분별하지 않는 지혜,
즉 묘관찰지(妙觀察智)이다.
그녀의 눈은 말하지 않으나,
모든 허상을 꿰뚫는다.
이것이 예술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통찰이다.
장면은 점점 자아를 제거한다.
그녀는 주체이기를 멈추고,
단지 '현상'으로 남는다.
無相(무상) — 형상 없는 형상,
그리고 無漏法(무루법) — 집착 없는 감정.
이로써 우리는 궁극적 비어 있음,
극공(極空)을 감각하게 된다.
우리는 표현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다린다 — 사라지는 형상,
응시되는 감정, 멈추는 숨결을.
이는 창작이 아닌 관조이며,
주장보다 비움의 태도에 가깝다.
그 경계조차 흐려진 한 컷의 끝에서 — 우리는 창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