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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도 거리두기가 필요해요

부끄러움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

브런치에서 알람이 왔다. ‘기타 목적으로 00님이 제안을 하였습니다. 이메일을 확인해보세요.’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알람을 받으면 열어보기 전부터 설레고 기분이 좋다. 전에도 글을 좋게 읽었다는 메시지를 몇 번 받았던지라 솔직히 이번에도 기대가 됐다. 글은 나와 잘 모르는 타인을 연결해주고 그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또 그런 공감이 내게 다시 글을 쓰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메일을 확인했다. 한 교육 콘텐츠 채널에서 내가 쓴 <두 번째 대학생> 글을 소개하고 싶다는 내용이다. 내 글을 좋게 읽어주어 감사한 마음이 든 동시에 ‘내 글이 과연 특정 채널에 소개될 정도로 괜찮았던가?’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다른 매체에 소개가 되면 내 글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도 관심을 가질 좋은 기회란 생각에 이왕이면 ‘잘 쓴’ 글을 내세우고 싶었다. 제목은 기억이 났지만 내가 뭐라고 쓴 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아 곧장 글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두 번째 대학생>은 올해 3월 20일에 작성한 글로 내가 회사원에서 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후 회사에 어렵게 퇴사 이야기를 꺼내기까지의 심정이 담긴 글이다. 그 경험은 어떤 한 사람으로 인해 내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기억의 한 조각으로 남아있었고 어쩌면 지금의 내가 있게끔 한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들었던 말 중 가장 인상 깊은 말은?’이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난 이때의 기억을 끄집어낼 것이다. 그만큼 내 인생에 중요한 획을 그은 사건에 대해 쓴 글을 타인도 인상 깊게 읽었다니 먼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몇 개월이 지난 글을 읽는 일은 내게 그리 흔치 않다. 매일 새로운 글을 써야 하는 부담감이 있고 내 손을 이미 떠난 글은 생명력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과거의 글과 마주하는 일은 곧 부끄러움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에 용기가 필요했다.


글을 쓴 당시는 내 머릿속에 글을 쓰기 위해 옛 기억을 떠올리고 그때의 감성에 충만했을 시기이다. 여러 번 수정 작업을 거쳐 한 편의 글이 완성된 후에도 ‘이 정도면 됐어’라며 글을 쓴 수고로움과 해냈다는 자신감에 더 도취되기 바쁘다.


6개월 만에 마주한 글을 한 문장씩을 읽어 나갔다. 역시 첫 문단을 읽고 뿌듯함은 이내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이 글이 정녕 그 당시 여러 번 수정 작업을 거쳐 쓴 글이 맞나?’싶을 정도로 형편없기 짝이 없었다. 공개하기 부끄러워 일기장 한 켠에나 있을 법한 글이 그동안 만천하에 공개되어 여러 사람들이 읽었다고 생각하니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다.


나는 글을 쓸 때 특히 ‘퇴고’에 심혈을 기울인다. 즉, 글 쓰는 시간이 2시간이라면 그중 한 시간은 내 의식이 흐르는 대로 글을 쓰고 나머지 한 시간은 수정하는데 시간을 보낸다. 그만큼 퇴고 작업은 내 글을 멋지게 포장해주는 아주 중요한 절차다.


<두 번째 대학생> 글을 쓴 당시도 난 여러 번 퇴고 과정을 거쳤고 이 정도면 ‘아주 잘 쓴 건 아닐지라도 내 선에선 최선을 다했다’라고 느꼈던 글이다. 하지만 첫 몇 문단을 읽고 나서 내 눈은 더 이상 다음 문단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부터 해서 ‘~하는 것이다’처럼 습관처럼 쓰는 표현, ‘나의~’, ‘~ 하고서는’처럼 글자를 늘여서 쓴 말, 앞에 쓴 단어나 표현을 반복해서 쓴 문장들이 눈에 거슬렸다. 이 문장들을 여러 번 읽고 더 매끄럽게 고쳐나갔다. 그 후에는 글 전체적인 맥락에 어울리지 않은 문장, 긴장이 고조된 지점에서 긴장감을 살리지 못한 표현, 밋밋하고 감정표현이 덜 된 문장들을 실랄하게 수정해 갔다. ‘간단하게 수정 작업을 해야지’ 했던 나는 거의 2시간 동안 수정 작업에 매달려야 했다.


진짜 나를 잘 알고 내 글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독자도, 글쓰기 선생님도 아닌 몇 개월 후의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내가 쓴 글을 시간을 두고 읽게 되면 잘 알고 있는 대상에 객관적인 시각까지 가질 수 있다. 강원국의 <나는 말하듯이 쓴다>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아무리 완벽한 글도 다시 보면 반드시 고칠 대목이 있다. 주야장천 보고 있다고 고칠게 눈에 띄지 않는다. 글과 멀어졌다가 다시 보는 것을 반복해야 한다.


글과 멀어졌다가 다시 마주하는 일은 그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 수 있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6개월 전에 쓴 글이 부끄러우면 그 6개월 동안 난 글쓰기로 성장했단 증거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몇 개월이 지나면 나에게 부끄러움을 줄 것이다. 아니 분명히 준다. 이는 내가 성장했다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글쓰기에도 거리두기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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