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싱 여자 사브르 단체 동메달전이 열리고 있었다. 한국 대 이탈리아의 경기로 9세트 중 6세트, 점수는 28대 23으로 한국이 뒤져 있다. 꽤 점수가 많이 벌어진 상황이었다. 그때 해설자가 한 말이 내 귀에 콕하고 박혔다.
그 전에도 이런 경우 역전해서 잘 이겨냈거든요. 그러면 이번 상황도 잘 이겨낼 수 있다는 거예요. 할 수 있어요!
지난번에 해냈으니 이번에도 할 수 있다는 말. 이 말이 인상 깊은 이유는 내가 글쓰기 전에 항상 다짐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어떻게 글을 쓰지? 어떤 내용으로 글을 쓰지?’라는 막막함이 한아름 몰려올 때 ‘지난번에도 해냈잖아. 이번에도 잘 쓸 수 있어’라는 말을 속으로 되뇐다.(여기서 ‘잘 쓴다는 말’은 좋은 글을 쓴다는 말이 아닌 그냥 흰 바탕에 까만 글씨로 뭐라도 채워나가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틀에 한 번, 또는 삼일에 한 번 꼴로 브런치에 글을 올리지만 나에겐 글쓰기는 ‘다짐’을 해야만 쓸 수 있는 아직 가까이하기엔 먼 당신이다.
내가 글을 쓰기 전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그때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돌아봤다.
글을 쓴 당일 아침 풍경
새벽 5시 30분에 시작한 글쓰기는 아침 8시쯤이 되면 끝이 보인다. 한글 파일에 초고를 작성하고 결말이 미완성일지라도 글쓰기의 2/3 고지선을 넘어가면 난 브런치를 열어 복사 붙이기를 한다(그러고 보니 난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위해 글을 쓴다). 그리고 다시 결말을 작성한다. 적당한 사진을 고르고 맞춤법을 확인한다. 다 된 것 같지만 나에겐 가장 중요한 과정이 하나 남아있다. 바로 ‘수정하기’다. 내가 쓴 글은 나 혼자 보는 일기가 아니기에 '초고는 쓰레기다’라는 명언을 떠올리며 무한 반복 읽기가 시작된다. 더 이상 비문, 틀린 단어, 빼거나 추가할 문장이 안 보이면 발행 버튼을 누른다. 이제는 핸드폰으로 다시 읽어 본다(컴퓨터 화면과 핸드폰 화면으로 글을 읽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이때는 마음이 더욱 바빠진다. 이미 내 손을 떠나버린 누구나가 읽을 수 있는 글이 되어 버렸기에 누가 읽기 전에 빨리 수정할 거리를 찾아야 한다. 이 작업까지 다 마쳐야 후련함이 몰려온다. 나는 마치 개학 하루 전 몇 시간에 걸쳐 밀린 숙제를 끝마친 아이가 되어 있다. ‘어떻게 하지?’란 막막함은 ‘아~ 이번에도 해 냈구나’라는 안도감으로 변하며 기분은 최고가 된다. 후련한 기분으로 상쾌한 하루를 시작한다.
글을 쓰지 않는 날 새벽 풍경
글을 쓰지 않는 날도 똑같이 새벽 5시에 기상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나니 기분도 상쾌하다. 하얀 백지를 채워야 하는 부담감도, 글쓰기 소재를 찾아야 하는 의무감도 없다. 오직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 나만의 시간을 즐기면 된다. 누가 일어나라고 등 떠미는 것도, 안 일어난다고 뭐라는 사람도 없지만 동이 트기 전 어수룩한 새벽 풍경이 날 설레게 하고 나 혼자 깨어있는, 오로지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이 고요함이 좋다. 이 날은 그런 기분을 만끽하기만 하면 된다. 비록 오후 까지지만.
글을 쓰지 않는 날(다음날 글을 써야 하는 날) 저녁 풍경
작가들은 원고 마감 며칠 전 편집장의 독촉으로 ‘써야 한다는 압박’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글을 완성한다고 한다. 그들도 평소에 글 쓸거리가 넘쳐나고 글이 술술 잘 써져 마감 전 일찌감치 글을 완성하고 ‘역시 글쓰기는 참 쉬워요’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나와 다르지 않음에 인간미가 느껴진다).
글을 계속 쓰기로 결심했고 앞으로도 계속 써야 한다면 나에게도 이런 ‘압박을 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나에겐 가상의 편집장님이 계시다. 그녀는 오후가 되면 ‘내일까지 원고 꼭 마감하세요’라고 얘기한다. 그래. 내일까지는 어떻게든 한 편의 글을 써야 한다.
내 머릿속은 소재 찾기로 바빠진다. 어제, 오늘 무슨 일이 있었지?, 누가 무슨 말을 했지? 새로운 소식은 없나?, 마땅한 소재가 떠오르지 않으면 과거로 돌아간다. 직장 다닐 때 있었던 일, 학교에서 있었던 일, 유년시절의 기억까지 시계의 태엽을 거꾸로, 거꾸로 돌린다. 메모하는 공책을 펼치며 예전에 끼적이던 글씨들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냥 지나치던 메모가 새로운 글 소재가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는 날도 가끔은 있다. ‘내일은 이 소재로 글을 써야지.’라는 결심이 섰다면 그날 밤은 편히 잘들 수 있다. 하지만 도저히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다. 마치 내일 학부모님을 모시고 공개수업을 하는 날인데 준비가 하나도 안되어 있는 심정이랄까. 무서운 편집장님 얼굴을 떠올리며 잠들기 전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글 쓰는 당일 새벽 풍경
드디어 하얀 백지를 마주할 그날이 또 돌아오고 말았다. 그날은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를 한 아름 안고 일어난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이고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고생을 하지’ 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럴 때면 상상 속의 편집장님을 소환한다. 그녀는 완벽주의자이며 성질이 날카롭고 마감일을 칼같이 지키는 사람이다. 내 시선은 백지에 내 머리는 기억을 떠올리며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다. 어느덧 2-3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하면 신기하게 어떻게 해서든 한 편의 글이 완성된다. 잘 썼든, 못 썼든 평가는 나중일이다. 오늘도 글 한 편을 완성할 수 있는 힘을 냈음에 초점을 맞춘다. 일어날 때 안고 있던 돌덩어리가 이제야 가벼워졌다. 쓴 글을 보며 내 마음속에 잊고 지냈던 상처, 아픔, 그리움, 기쁨 등을 어루만진다. 글을 쓸수록 내가 더 단단해지고 성장하는 기분이 드는 것, 이것이야 말로 내가 글을 계속 쓰는 이유다.
펜싱 여자 사브르 단체 동메달 전에서 뒤지고 있던 한국 선수들은 결국 45대 42로 승리를 거두어 동메달을 따냈다. 예전에 그들이 해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들은 해냈다. 혹독한 훈련의 힘으로. 나도 지난번의 나처럼 오늘도 한 편의 글쓰기를 해냈다. 무서운 습관의 힘으로. 글을 마친 지금 나는 후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