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부럽지 않다

너는 너고 나는 나일뿐

얼마 전 김태희, 비 부부가 920억짜리 빌딩을 매입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920억… 920억… 기사 속 숫자를 한 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내가 잘 못 읽은 건가? 눈을 씻고 다시 봐도 9억도 아닌 90억도 아닌 900억이라고? 아무리 잘 나가는 일류 연예인이라 할지라도 개인이 이런 돈을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게 그 숫자는 무한대를 의미하는 ‘∞’ 기호를 떠올리게 한다. 죽을 때까지 쓰기만 해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숫자. 서민들은 절대 꿈도 꿀 수도 만지고 싶어도 만질 수 없는 형체 없는 숫자 말이다. 물론 대출이 껴 있다 할지라도 대출금을 감당할 재력이 있어야 대출도 되는 세상이다. 누가 집을 샀는데 그 집값이 올랐다고 하면 '부럽다'는 감정이라도 들 텐데 900억이라는 숫자를 듣는 순간 '부럽다'라는 느낌마저 들지 않았다. 그냥 저 부부는 나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구나. 나 같은 사람은 결코 넘볼 수 없는 그 어딘가의 존재하는 세상 속 사람들처럼말이다.


회사 신입사원 시절 한 과장님이 던진 질문이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입사하고 얼마 안돼 과장님께 한참 업무를 배우고 있을 때 그 과장님이 물었다.


“알라 씨는 어디 살아?”

“전 OO동에 살아요.”

“아~~ 거기, 서울에서 집값 가장 싼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내 얼굴이 붉어졌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20대 초반의 나이, 그야말로 순진했던 나는 과장님이 순수하게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사원이 어디 사는지를 궁금해서 묻는 줄 알았다. 내가 사는 곳을 말하면 ‘그럼 집에서 회사까지 얼마나 걸려?’나 ‘거긴 OO랑 좀 가깝지 않아?’등의 반응을 예상했다. 과장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내가 그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집값?, 잘 사는 동네는 어디고, 못 사는 동네는 어디지? 그런건 어디에 나와있지?


과장님은 능력도 발휘하기 전에 ‘집값이 싼 동네에 사는 아이’로 나를 재단해 버렸고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능력을 인정받아도 그 눈빛에는 ‘그래 봤자 못 사는 집 아이’라는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 표정은 바로 옆 부서에 있는 J를 바라볼 때와는 사뭇 달랐다. '나만 잘하면 된다'라고 생각했던 나는 사회가 휘두르는 '배경'에 대한 실랄한 평가에 갈기갈기 찢겨졌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내가 사는 곳은 그야말로 ‘밑바닥 동네’였고 저 너머에는 내가 넘볼 수 없는 ‘넘사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 J를 통해서 말이다.


J는 옆 부서에 들어온 계약직 직원이었다. 입사할 때부터 ‘사장님 백으로 들어왔네, 얼굴 예뻐서 들어왔네, 집안이 좋아서 뽑혔네’등의 소문을 달고 살았지만 나에게는 그저 예쁜 동생이었다. 여직원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아 친구가 없었던 J는 특히 내게 의지했고 우린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는 친한 언니 동생 사이로 지냈다. 그녀는 자기 집안에 대해 한마디도 한적은 없지만 ‘난 부잣집 딸내미야’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항상 세련되게 차려입은 깔끔한 브랜드의 옷(그 아이로 인해 처음 알게 된 브랜드도 많았다), 명품백, 청담동 귀부인들이 신고 다닌다는 명품 브랜드 구두, 옆에 가면 풍기는 좋은 향수 냄새까지. 그야말로 그녀는 세련되고, 부티나는 어디에서도 눈에 띠는시선 강탈자였다. 상사들도 그녀를 아기 대하듯 대했다. 실수를 해도 그냥 넘어가고, 그녀의 자리에 가서 말 한마디라도 붙이며 실없는 농담을 해댔다. 그 당시 J를 ‘그냥 좀 사는 집 아이’로만 짐작만 했던 나는 내 생각이 큰 오산이었음을 몇 년 후에 알았다.


나와 J는 모두 퇴사를 했고 나는 교사로 그 친구는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우린 새 출발을 했다. 그녀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은 나는 서운한 마음을 내비쳤고 ‘언니 미안해, 그럴 사정이 있었어. 보고 싶어’라는 J의 말에 우리의 만남은 약 5년 만에 성사됐다. ‘강남 OO에서 볼까?’라는 그녀의 말에 나는 퇴근 후 부랴부랴 강남으로 달려갔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강남까지 가려면 족히 한 시간은 넘는 거리였다. 늦지 않게 도착해 오랜만에 동생이 어떻게 변했을지 그리고 어떤 사람과 결혼을 했고 뭐하며 살고 있는지 등을 다 들어볼 기세로 앉아 있었다.


저 멀리서 J가 반가움을 가득 담은 하이톤 목소리로 ‘언니~’라고 부르며 내게 다가왔다. 우리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포옹하며 그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세월도 끌어안았다. 이제 막 30대에 들어선 동생은 나보다 어린 나이임에도 결혼을 해서 인지 아침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청담동 귀부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언니 잘 지냈어? 교사 됐다고 들었어. 정말 잘됐다.”

“고마워. 넌 어떻게 지냈어? 그리고 언제 결혼한 거야? 연락도 없이.”

“미안해 언니. 결혼식에 모두 초대할 수가 없었어. 가족들과 친구 몇 명만 모여서 해외에서 했거든.”

“아…… 해외?? 결혼을 해외에서 했다고? 해외 어디? ”

“발리에서 했어. 결혼하고 거기서 바로 신혼여행도 즐기고 왔어. 가족들, 친구들과 다 같이.”


이게 무슨 드라마 속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인가. 해외에서 결혼이라니. 연예인들이 취재진을 피하고 세간의 관심이 부담스러워 종종 해외에서 하는 경우는 봤어도 내가 아는 일반인이 해외에서 결혼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그리고 속으로 계산했다.

‘발리까지 가족들과 친구들 비행기표며 호텔, 여행경비 그리고 연회장까지 다 예약하려면 대체 그게 얼마야?’

J는 그동안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좀 잘 사는 애’ 수준을 뛰어넘어 보였다. 우리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남편은 어떻게 만났고 뭐하는 사람이야?”

“남편은 대학원에서 하는 세미나가 있었는데 거기서 만났어. 자기 회사를 하나 운영하고 있고 스튜디오도 가지고 있어. 남편이 바빠서 그 스튜디오 지금은 내가 운영해. 나도 경영은 처음이라 엄청 바쁘네. 어제도 새벽 2시까지 직원들과 회의했다니깐.”


동네 조그만 사진관만 다녀봤던 나는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새벽 2시까지 회의할 일이 뭐가 있는지 의아했지만 그 친구가 바쁘게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있는 점은 확실해 보였다. 회사 다닐 때보다 훨씬 생기 있고 행복해 보여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뒤로도 그녀는 삼성동에 신혼살림을 차렸고 일 년 중 거의 반은 해외에서 지낸다는 점, 시어머니와 친정 엄마가 서로 친해서 같이 해외여행을 다니는 사이라는 점, 시동생과 자기 동생이 동갑이라 친구가 되었다는 믿기 힘든 일화 등을 연이어 늘어놓았다. 나는 옆에서 계속 '와 진짜? 너무 잘 됐다. 사돈끼리 진짜 사이좋아 보인다'라고 맞장구를 쳤지만 내 마음은 고양된 그녀의 목소리와는 달리 한없이 밑바닥으로 내리쳐졌다.


그리고 비로소 보였다. 명품으로 휘감은 그녀와 인터넷 쇼핑으로 싼 것만을 찾아다닌 나 사이의 거리감이. 태생적인 부잣집 딸내미인 그녀와 태생적으로 가난한 집 딸내미인 나와의 거리감이. 나도 나름 내 꿈을 향해 열심히 달려왔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뿜에 내는 알 수 없는 돈의 위력에 그날 나는 처참히 박살 나고 말았다.


J는 그야말로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같았다. 나와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여성이란 점을 빼면 아무런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사람. 그녀가 사는 삼성동과 내가 사는 ‘집값 싼 동네’ 사이의 물리적 거리보다 그녀와 나 사이를 감싸는 태생적 거리감은 우리를 더 멀어지게 했다.


그녀는 남편이 끌고 온 벤츠 차량을 타며 ‘다음에 또 봐’란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난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은 온통 장미 빛깔이겠지? 저 아이에겐 세상이 얼마나 만만할 까?'


결론적으로 나는 지금 J와 연락하지 않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음이 가는 대로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돼버렸다. 나에겐 아직도 '삼성동'하면 그 친구가 생각나고 그녀의 화려해 보여 부러웠던 삶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녀의 삶을 그다지 부러워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그녀에게 걸맞은 삶이 있고 나는 나에게 걸맞은 삶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내겐 그 동생이 사는 이야기는 김태희가 920억짜리 건물을 샀다는 이야기만큼 부럽지도 관심도 없는 마냥 부질없는 이야기로 다가온다.


그래도 난 여전히 믿는다. 이 세상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만들어진 뒷배경을 무기로 삼는 사람보다 피나는 노력으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많은 기회가 열려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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