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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자라는알라씨 Apr 03. 2021

워킹맘으로 산다는 것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

작년 5월쯤 언니에게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언니! 잘 지냈어?”

“어. 난 잘 지냈어. 하노이는 코로나가 좀 어때?”

어느덧 코로나는 안부를 물을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요소가 되었다.

“여긴 이제 많이 좋아져서 아이들 학교 가기 시작했어. 한국은 아직 심각하지?”

“여긴 지금 난리도 아니야. 계속 늘어나고 있어.”

“어째. 마스크 잘 쓰고 되도록 돌아다니지 마.”

“그래야지. 그리고 미연아 나 할 말이 있어.”

“응~ 무슨 일 있어?”

‘할 말이 있다’라는 말은 항상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나 임신했어.”

“뭐? 축하해! 드디어 나에게도 조카가 생기는 거야?”

“어, 그렇게 됐네.”

“지금 몇 주 됐어?”

“이제 9주 정도 됐어.”

“꽤 지났구나. 입덧은 있어?”

“아니. 입덧 하나도 없고 지금 아주 잘 먹고 있어.”

내가 입덧으로 심한 고생을 했기에 입덧이 없다는 언니 말에 안심이 되었다.

“진짜? 정말 다행이다. 몸조리 잘하고”

“그래 알았어. 다음에 또 통화해.”

“응~ 언니 또 통화해.”


  나에게는 두 살 많은 언니가 한 명 있다. 내가 지금 41살이니 우리 언니는 43살. 언니는 43살의 나이로 3월에 아이 엄마가 되었다. 남들은 초등학생, 빠르면 중학생 학부모가 되는 시기에 언니는 지금 한 살짜리 아이 엄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언니의 임신과 출산 과정을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웠다. 고령임신인데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한 시간 넘는 거리로 출근해야하는 언니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내가 언니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두 아이를 키우는 선배 엄마 아닌가. 내가 멀리서 해 줄 수 있는 일은 ‘임신 때 모습 사진으로 많이 찍어둬’, ‘아이 배속에 있을 때 육아 서적 많이 읽어’, ‘모유가 잘 안 나오면 힘들게 하지 말고 그냥 분유 먹여’, ‘자연 분만할 때 힘주는 연습 미리 해둬’ 등의 말들뿐. 다 내가 ‘진작에 그럴걸’하며 후회에서 나온 말들이었다.


  키 크고 늘씬한 몸매를 가져 별명이 미스코리아였던 언니는 막달이 되어서도 8kg이 쪘단다. 살이 안 찌는 체질은 임신해서도 살이 안 찌는 건지 아이에게 다 영양분이 간 건지는 모르지만 내 조카는 포동포동한 모습으로 3주나 일찍 세상에 태어났다.


  언니가 아이 엄마가 된 건 결혼하고 7년 만이다. 내가 언니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놀란 이유는 물론 고령의 나이기도 했지만 언니는 그동안 아이를 ‘못’ 가진 게 아니라 ‘안’ 가져서였다. 결혼하고 나서도  ‘우리는 아이 안 낳기로 했어. 애 하나 키우려면 돈도 많이 들고 우리는 그냥 우리끼리 살려고’라고 말해서 ‘내 팔자에 조카는 없겠구나’라고 내심 생각했다. ‘그래도 하나는 낳아서 키워야지’라고 말씀하시는 엄마에게도 ‘엄마가 키워줄 거 아니면 그런 소리 하지 마. 자식 문제는 부부가 결정하는 거야’라고 내가 쏘아댔다.

 

  내가 두 아이에게 시달리고 있을 때 언니는 형부와 주말이 되면 여행을 다니고 맛집을 찾아다니며 인생을 즐기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내심 부러웠다. ‘나도 저렇게 자유로운 시절이 있었지’, ‘저렇게 사는 것도 자기 자신을 위해선 좋겠다’, ‘자식에게 드는 돈이 없어서 마음의 짐이 덜하겠네’라며 언니의 선택을 믿었고 내가 가보지 못한 인생을 사는 언니를 응원했다.


  그런데 갑자기 언니의 임신 소식이 들려온 거다. 조카가 생겨서 기쁜 마음과 ‘지금 이 나이에 낳아서 어떻게 키우려고’ 하는 걱정하는 마음이 교차했다. 한국에서 아이를 낳고 워킹맘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 누구에게도 추천해줄 수 없는 일이 바로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오랜 고민 끝에 난 둘째가 9개월로 접어들기 시작할 즈음 복직을 했다. 첫 아이 출산휴가부터 계산해 보니 2년 8개월 만이다. 그 2년 8개월 동안 아이 때문에 기쁜 일도 있었지만 그 기간 동안 ‘나’란 존재는 점점 흐물해져 갔다. 어느덧 내 이름 석자보다 ‘00 엄마’가 더 편하게 느껴졌다. '여자 어른'이 그리워 동네를 기웃거리다 우연히 마주친 동갑내기 엄마랑 친구가 되기도 했다. 아이들이 컨디션이 좋을 때는 즐겁게 놀고 헤어지지만 아이들 간에 뒤틀리는 일이 생기면 깨진 유리잔에 갈라진 금처럼 우리의 관계는 금방 소원해졌다. 나랑 같이 임용된 친구들은 벌써 1정 연수를 받기 시작했고 ‘부장’ 교사 타이틀을 단 친구도 있었다. 나만 뒤쳐지는 것 같았다. 다들 전진하는데 나만 후퇴하는 기분. 친구들은 교육과정 회의를 할 때 난 아이들과 '까꿍, 곤지곤지, 죔죔' 하고 있는 기분. 복직하고 싶었다. 나도 어른들과 내 일과 관련된 전문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초임 발령받았을 때 처음 느낀 그 기분으로. 


  집과 학교와의 거리는 1시간. 늦어도 7시 20분에는 집에서 출발해야 학생들이 오기 전에 수업 준비할 시간이라도 주어졌다. 당시 큰 애가 다닌 어린이집은 오전 8시가 되어서야 문을 연다고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등원 도우미를 구했다. 아파트 게시판에 <등원 도우미 구합니다> 전단지를 붙였다. 7시까지 집에 오셔서 아이들 아침 먹이고 씻기고 옷 입혀 어린이집에 등원시키는 일이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연락이 없다. 복직 날짜는 점점 다가오고 초조했다. 다행히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시는 어머님 또래 이모님이 고민 끝에 연락을 주셨다.


“나 이런 거 하나도 안 해봤는데 잘할 수 있을까 몰라”

“아침 7시부터 9시까지만 봐주시면 돼요. 반찬은 제가 다 해놨으니 밥 데워서 반찬 꺼내서 그냥 주기만 하면 돼요. 이유식도 다 만들어놨어요. 부탁드릴게요”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2주가 넘도록 붙여놔도 연락이 온 분은 그 이모님뿐이었다. 꼭 잡아야 했다.

“그럼 해 볼게요. 보수는 애가 둘이니깐 좀 더 줘요.”

“네, 시세보다 조금 더 드릴게요.”


그렇게 나는 가까스로 등원 도우미를 구하고 출근했다. 퇴근은 길이 막혀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집에 도착하면 6시. 겨울이면 이미 깜깜한 시간이다. 어린이집에 가면 우리 아이 둘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서둘러 인사하고 난 집으로 다시 출근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조각배에 의지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혹시 애가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지? 워킹맘의 가장 큰 걱정은 애가 아파 어린이집을 못 가는 상황이 생기는 거다. 어린이집에 보내지기 위해서라도 아이는 아프면 안 된다. 예전의 내가 떠오르며 언니도 나와 같은 상황을 겪게될까 자꾸 현실적인 얘기들이 튀어나왔다.


“언니 육아휴직 얼마나 냈어?”

“우선 일 년 냈지.”

“그다음은 어떻게 하려고? 아파트 근처에 어린이집 있어?”

“있긴 있는데, 한 살짜리도 받아주는지 모르겠네.”

“그거 알아봐. 엄마도 집이 멀어서 쉽게 갈 수가 없잖아. 주변에 초등학교는 있어?”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어. 여기서 좀 걸어야 해”

“초등학교는 무조건 집이랑 가까워야 해. 그럼 이사 가는 것도 생각해야겠네.”

“천천히 생각하지 뭐.”


언니는 앞으로 닥칠 상황들을 모르는지 마냥 태연해 보였다.

나도 한국으로 돌아가면 바로 복직을 해야 한다. 동시에 나는 초등맘이 된다. 둘 중 하나라도 초등학생이 되면 좀 괜찮아지려나? 유치원은 늦게 라도 끝나지,  초등학생 1학년은 점심 먹고 바로 끝나는데 그럼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 아파오기 시작한다. 언제쯤이 되야 맘편히 직장생활을 할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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