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의 무게

수고하셨습니다

4월 말에 아파트 주변에서 평화롭게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과 내가 호기롭게 수영에 도전하는 글을 썼었다. 그런데 지금 하노이에는 그런 평화로운 모습도 수영을 즐기는 모습도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모든 놀이터와 운동기구, 수영장에는 ‘출입금지’라는 안내문이 붙었고 그 주변에는 폴리스라인처럼 줄이 처져 있다. 다른 이들이 이 모습을 본다면 꼭 살인사건이 일어났냐고 오해할 수도 있는 장면이다. 40도 가까이 이어지는 하노이 날씨 속에서 예전 같으면 실외 수영장에서 아이들의 까르르 웃는 소리, 물장구치는 소리가 들려 올 텐데 지금은 고요할 뿐이다. 이런 마음도 모르고 수영장 물은 햇볕에 반짝이며 은빛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한 달 사이에 하노이 상황은 급변했다. 5월 초에 발표된 하노이 코로나 사회적 지역 감염자 수는 3명에서 현재(5.31(월))자로 누적 총 400명이 넘었다. 모든 학교는 등교 중지 상태며 모든 식당에서도 매장 내 식사는 불가능하고 오직 테이크 아웃만 가능하다. 하노이에서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박장', '박닌' 이란 곳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박장은 현재 총 2,100여 명, 박닌은 800명이 넘게 감염자가 나왔다. 6/1(화)부터 6/8(화)까지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을 통해 해외 입국이 중지됐고 또한 전파력이 강한 신종 변이 바이러스까지 퍼지고 있다니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로 베트남은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박장’, ‘박닌’ 이 두 곳은 한국기업 <00 전자>와 그 협력업체가 몰려있는 곳이다. 당연히 많은 한국 주재원들이 일하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한 가정의 가장들이며 매일 가족들이 사는 하노이로 매일 출퇴근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노이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코로나 음성 판정서’ 확인이 있어야 하고 수시로 진행되는 코로나 검사, 전파의 가능성 등을 고려하여 회사 측은 아예 회사에서 숙박, 숙식을 하도록 결정한 모양이다. 문제는 숙박 시설이 부족해 텐트를 구해 그곳에서 먹고 자야 하고 화장실도 한참 부족하다고 한다. 그야말로 가장들은 열악한 상황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버텨야 하는 상황이다.


회사의 이런 결정으로 하노이에 있는 가족들도 남편과 아빠와 갑작스러운 생이별을 해야 했다. 코로나가 어느 정도 진정되기 전까지는 주말에도 오갈 수 없는 상황이기에 이 이별의 끝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인 중 한 분은 작년에 아이들과 함께 한국에 갔다가 코로나로 인해 한동안 남편을 못 만나다 겨우 만났는데 또 이렇게 생이별을 해야 할 판이라며 한탄해했다. 심지어 출산을 앞둔 가족에게도 예외란 없었다. 남편을 한동안 먼 곳으로 보내야 하는 아내와 타지에서 홀로 출산과정을 견뎌야 할 아내를 생각하는 남편, 이 둘의 입장을 모두 생각하니 안타까움은 배가 되는 것 같다.


아마도 많은 주재원 가장들이 코로나가 퍼져나가고 숙식이 열악한 환경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것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무게감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되면서 가장이 된다(물론 여자들도 가장이 될 수 있다). 즉, 한 가족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가장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하게 차지하는 부분은 바로 가족이 먹고 입고 살게끔 발판을 마련해 주는 일이다. 즉,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내 가족이 기본적인 생활을 하며 살아가게 하는 일이 가장의 역할이다.


만약 오늘 내게 어떤 일이 주어져 그 일을 책임지고 끝까지 완수해야 한다면 그 일이 완수되기 전까지 내 마음의 짐은 상당할 것이다. 작은 일을 처리하는데도 이런데 하물며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무게는 어떨까. 가장들은 평소 무거운 ‘삶의 짐’을 머리 위에 가득 얹고 생활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가장이 보이지 않은 무거운 짐을 잘 들고 있으면 가족들은 그 무게감을 잘 모른다. 그 짐이 무너져 밑바닥에 내동댕이처지고나서야 비로소 실감한다. 그 짐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쌓아 올리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나는 이른 나이인 중학생 때 알았다. 바로 내 아버지를 보고서 말이다. 초등학교 때 레스토랑을 운영하신 아버지는 나름 잘 나가는 레스토랑 사장님이셨다. 돈가스는 특별한 날에 먹는 귀한 음식이던 시절 나는 주말이면 아빠 식당에 가서 돈가스, 생선가스, 함박스테이크 등을 먹으며 자랐다. 당시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도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우리 집을 특별하게 바라보셨다. 그래서 우리가 잘 사는 줄 알았다. 그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것은 중학교에 올라가고 나서야 알았다. 아버지는 운영하시던 레스토랑을 당시 주방장님에게 파셨고 가족이 살던 아파트를 처분한 후에 우리는 조그만 반지하집으로 옮겨졌다. 알고 보니 아버지의 레스토랑은 계속 적자가 이어졌고 살던 아파트는 대출을 감당하기 힘드셨던 거다.


잠시 넘어졌던 아버지는 다시 일어나기 위해 부단히 애쓰셨다. 정수기 판매, 택시기사, 전기 기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다. 일이 끝나면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에 다니면서 졸린 눈을 비비며 공부도 하셨다. 아버지는 넘어지는 순간에도 가장의 책임감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런 세월 속에서 아버지의 얼굴에는 어느새 주름이 한 줄씩 늘어갔고 깊은 한숨 속에서 삶에 대한 원망이 새어 나왔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고 그 무게감을 견뎌내야 하는 일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 수 있었다. 70이 넘으신 지금까지도 아버지는 일의 끈을 놓지 않고 가장이란 무게를 견디고 계신다. 이제는 좀 내려놓으실 법도 한데 말이다.


회사에 갇힌 체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일하고 계실 박장, 박닌 지역 주재원 가장 님들, 그 외에 어디선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계실 모든 가장 님들께 '수고하셨다. 힘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가장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신 내 아버지 그리고 지금 우리 집의 생계를 책임지고 계신 우리 집 가장 님께도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힘들게 일하고 들어온 가장 님을 위해 오늘 저녁에 맛있는 요리라도 대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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