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온 후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베트남의 숨은 명소를 여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곳으로 이민을 온 게 아닌 기한이 2-3년으로 정해진 주재원과 그 가족으로 왔기에 이때 아니면 언제 오겠냐는 마음으로 틈나면 여기저기 여행을 다닌다(실제로 베트남을 떠나면 와봤던 베트남보다는 다른 나라를 여행할 것이다). 베트남은 기존에 잘 알려진 호찌민, 다낭, 나짱뿐 아니라 섬 지역으로 아름다운 바다를 볼 수 있는 푸쿠옥, 산간지역으로 ‘달랏 우유’와 딸기가 유명한 달랏, 하노이 인근 지역인 하롱베이, 닌빈, 바비산 등 주로 천연 자연환경을 볼 수 있는 곳이 무궁무진하다. 아마도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서 베트남에서 있었던 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뽑는다면 베트남을 여행한 그 순간들일 것이다.
지난 주말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닌빈(Ninh Binh)으로 여행을 떠났다. 닌빈으로 떠나는 여행은 이번이 두 번째다. 닌빈은 제2의 하롱베이라 불리며 하노이에서 차로 2시간 정도 떨어져 있어 하노이에서 당일치기로 여행이 가능한 곳이다. 특히 지난번에 여행을 한 ‘땀꼭(Tom Coc)’이라 불리는 곳은 작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며 바위산과 동굴, 기암절벽 등 그야말로 자연이 선물해준 장관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의 위대함과 웅장함에 압도되어 나도 모르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번에는 지난번에 간 땀꼭이 아닌 숲 속 산장에 와 있는 듯한 리조트에서 하루 쉬다 가기로 했다. 5월부터 다시 심해진 현지 코로나 사정으로 수영장, 식당, 헬스장, 미용실 등 주요 상점들이 문을 닫고 그야말로 집콕 생활을 2달째 이어오고 있었던 터라 여행을 가자는 남편의 말은 어느 사탕발림 말보다도 달콤했다.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 시점에 다행히 지난주부터 상점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고 우리도 기나긴 집콕 생활을 끝내고 코로나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닌빈으로 떠났다. 집을 떠나 어딘가 새로운 곳을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와 아이들은 가뭄 속에서 빗줄기를 만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행을 많이 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 나의 여행 패턴이 많이 변해있음을 느꼈다. 그 변화의 지점에는 바로 아이들의 탄생이 있다. 나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여행 책자에 나와있는 곳을 되도록 많이 볼 수 있도록 여행 내내 부지런히 움직였다. 여행코스를 미리 정해놓고 유명하다는 현지 맛집을 미리 알아보고 동선을 정했다. 그 여행 일정은 보통 호텔 조식 후 바로 시작되며 여행지에 와서 호텔 방 안에서 쉬며 지내는 것은 여행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먹고 여러 가지를 체험하고 늦은 밤 호텔로 돌아와서 피곤함을 느껴야 ‘아 오늘도 여행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고부터는 더 이상은 그런 여행을 할 수가 없다. 아니 안 하고 싶다. 아이가 충분히 크면 몰라도 5-7세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행위들은 내겐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닌 고난의 연속이었다. 가기 전부터 '거길 가면 고생길이 훤하겠구나'라는 게 보였고 아이들도 더운 날씨에 걷는 것에 금방 지치고 힘들어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에 많아 봤자 가고 싶은 곳 한 군데를 정해서 얼른 다녀온 후 거의 호텔에서 물놀이를 하며 쉬는 쪽을 택했다. 그야말로 힐링에 중점을 둔 여행으로 바뀌었다.
이번 여행의 포인트도 자연과 힐링이다. 기존에는 복도로 쭉 이어진 방 중 하나를 골라서 들어갔다면 이번에는 숲 속 곳곳에 떨어져 있는 빨간 뾰족 지붕 중 하나가 우리가 묵을 곳이다. 시멘트 냄새 대신 나무 냄새가 우리를 반겼고 발을 내딛을 때마다 들리는 삐그덕 소리가 듣기 좋았다. 커다란 창문을 여니 눈앞에 숲 속 길이 펼쳐졌다. 온통 푸르름뿐이다. 나비와 벌이 자유스럽게 날아다닌다. 이곳에서는 그들이 주인이고 나는 단지 잠시 왔다 가는 손님일 뿐이다. 햇살이 나뭇잎에 반짝거렸다.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이란 노랫말이 생각났다. 지금 이 순간은 ‘햇볕은 쨍쨍 나뭇잎은 반짝’으로 바꾸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헨젤과 그레텔에서 본 하늘로 높게 솟구친 뾰족 지붕은 방을 더욱 환하고 넓어 보이게 한다. 창문 틈으로 나뭇잎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마음은 이미 자연과 하나가 되어 벌레가 들어와서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으레 그려려니 한다.
이번 여행의 오두막집 숙소 모습
여행지의 명소가 아닌 단지 잠자는 장소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여행하는 기분이 물씬 느낄수 있다. 숙소에서 짐을 푸는 일이 피곤함이 아닌 설렘의 시작으로 다가왔다. 한때 호캉스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호캉스는 호텔과 바캉스가 합쳐진 말로 멀리 여행을 떠나지 못할 경우 가까운 호텔에서 쉬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이 단어가 요즘 가장 하고 싶은 여행 타입이 되었다. 아마도 이런 변화에는 아이만의 영향만은 아닌 것 같다. 나도 어느새 40대가 되었고 몸의 에너지를 소진시키기보다는 쉼으로써 에너지를 얻는 방법을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여행이 나에게 주는 선물은 바로 ‘너그러움’이 아닌가 싶다. 여행 중 나는 한없이 너그러운 사람이 된다. 여행지에서는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이거 먹고 살찌면 어쩌나’하는 걱정도 내려놓는다. 잠시나마 나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무엇을 해야 할 의무감에서 해방된다. 보통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데일리 루틴’ 란 게 생긴다. 엄마인 나에게도 데일리 루틴이 있다. 5시에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글을 쓰거나 책을 본다. 세탁기를 돌리고 아이들이 일어나면 밥을 챙겨 주고, 아이들 공부를 봐준다. 점심과 저녁 메뉴를 고르고 식사 준비를 하고 설거지를 한다. 여행지에서는 이런 데일리 루틴이 깨져도 그다지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7-8시까지 늦잠을 자고 어슬렁거리며 일어나도 밥 걱정안 해도 된다. 빨래도 대충 말려 꾸깃꾸깃 가방에 집어넣는다. 여행지에서는 내가 가진 타이틀을 벗어던지고 단지 ‘여행객’ 중 한 사람이 된다.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면 자연스레 주변 사람들에게도 너그러워지는 법. 멋진 곳에서 이 같은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가족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