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하노이는 한낮에는 거의 40도, 체감온도는 50도를 육박하고 있다. 1층 현관문을 열면 마치 사우나에 온 것처럼 뜨거운 공기가 내 온몸을 감싸고 모든 혈관을 최대한 확장시킨다. 5분만 지나도 땀이 삐질삐질 나 찝찝한 기분이 들어 어서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싶어 진다. 저녁 시간이 되어서까지 이런 후텁지근한 느낌이 이어져 하노이에서 낮에 산책을 즐기는 위해서는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내가 사는 아파트 맞은편으로 길을 건너면 상점과 집이 섞여있는 고급 빌라단지가 나온다. 한국에서도 그렇듯 여기서도 돈 좀 있는 사람들은 아파트보다는 단독으로 정원을 꾸미고 살 수 있는 고급 빌라를 선호한다. '베트남 부유층들은 어떻게 집을 꾸미고 사나' 호기심을 갖고 걸으면 구경하는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 그래서 해가 살짝이라도 구름에 가리는 날이면 나는 이곳으로 종종 산책을 나선다. 눈에 좋은 것을 담고 싶은 욕구는 용광로 같은 더위를 피하고자 하는 욕구보다 더 강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한적한 고급 빌라가 즐비한 길로 들어섰다. 이곳에 오니 차 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새들이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소리뿐이다. 빌라들은 멀리서 보면 흰색 3층짜리 건물에 앞마당에는 나무와 꽃으로 정원이 가꾸어져 있어 기본적인 외관은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집만의 개성을 엿볼 수 있다. 같은 흰색 건물이지만 유독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집, 3층 테라스를 숲 속에 온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잘 가꾸어 놓은 집, 두 개의 빌라 사이에 벽을 허물고 하나의 넓은 마당으로 개조한 집, 개성 있는 나무와 꽃을 키우는 집, 마당에 작은 연못을 만들어 물고기를 키우는 집, 새를 키우는 집, 심지어 닭을 키우는 집들까지.
발걸음 속도를 늦추며 걸어보았다. 눈길이 가는 대상 앞에서 잠시 멈추고 깊이 있게 대상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전혀 관심 밖의 대상들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특히 집 앞에 주차된 고급 승용차보다 더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바로 정원 담장을 넘어 길가로 뻗어 나온 예쁜 꽃과 나무들이다. 이 나무는 무슨 나무지? 이건 무슨 꽃이지? 이건 무슨 열매지? 사진을 찍고 스마트 렌지로 검색을 했다. 그동안 나는 경주마와 같이 앞만 보고 살다 보니 봄이 오면 꽃이 피나보다, 가을이 오면 낙엽이 지나보다 했다. 저 꽃이 무슨 꽃인지 무슨 나무인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곳에 신경 쓰는 일은 한량한 사람들이나 하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관심을 가진 지금은 그 존재들이 그렇게나 예쁠 수가 없다. 과거의 내가 원망스럽게 느껴진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몇 가지 나무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먼저 망고나무는 하노이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4-5월부터 나무에서 열매들이 하나둘 맺히기 시작하더니 6월이 되니 더욱 탐스럽게 자신의 존재를 뽐내고 있다. 길을 가다가 가끔씩 상태가 온전한 망고를 주우면 보물을 찾은 것처럼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한국에서는 비싸게 사 먹는 망고를 여기서는 길에서 주워서 먹을 수 있다니 이런 게 바로 횡재가 아닌가. 가끔 길을 걷다 누가 노란색 물감을 뿌려놓았나 싶어 가보면 잘 익은 망고가 속살을 드러내고 바닥에 철퍼덕 떨어져 있다. 지저분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그 망고 특유의 샛노랑의 발랄함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상큼해진다.
망고나무와 주운 망고들
다음으로는 박과 포멜로다. 사실 이게 생김새만 봤을 때 박인지 확실히는 모르겠다(네이버만 믿는다). 박은 내게 생소하지만 보통 호박죽을 끓여먹는 호박보다 매끈하고 줄무늬가 없다. 식이섬유가 많고 지방이 적어 다이어트에 좋다니 식용으로도 그 역할을 톡톡히 하나보다. 포멜로는 중국 자몽이라고 불린다. 누르면 약간 말랑 말라한 감이 느껴지고 커다란 오렌지나 자몽을 보는 듯하다. 이 역시 노랗게 익으면 과일이나 잼, 음료로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이들처럼 탐스런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를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서 벅차오름과 감격스러움이 몰려온다. 저들은 저렇게 커다란 열매를 맺기까지 얼마나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했을까. 저 무게를 지탱하는 가느다란 줄기에선 연약함이 아닌 강인함이 느껴진다. 마치 온갖 고난 속에서도 무럭무럭 자라는 자식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어머니의 강인함처럼.
박과 포멜로
마지막으로 두리안이다. 마트에서 숱하게 봐왔었지만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은 처음이다. 두리안하면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 십여 년 전에 친구와 태국 여행을 갔는데 그 호텔 방안에는 '방 안에서 두리안을 먹지 마시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알고 보니 한번 두리안 냄새가 방안에 물들면 잘 빠지지 않을 만큼 냄새가 지독해서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도 어느 집에서 두리안을 먹으면 그 냄새가 복도 전체를 타고 돌아 문 틈 사이로 들어온다. '무슨 이상한 냄새가 난다'하고 대문을 열어보면 이미 복도에는 두리안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만큼 냄새로 악명 높은 과일이지만 맛과 영양은 뛰어나다고. 왠지 나에게는 아직까지 진입장벽이 높은 과일이지만 맛이 좋다고 하니 한 번쯤 시도해보고 싶다.
속도를 늦추니 비로소 볼 수 있었다. 그들을 보니 자연의 신비함과 위대함에 눈과 마음이 즐거워진다. 그리고 행복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