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수 없는 메시지

그리운 삼촌

아빠에게는 형이 한 명, 남동생이 3명 있다. 그러니깐 둘째인 아빠까지 하면 총 5형제가 되는 셈이다. 어릴 적 큰집에 가면 여자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 곤 큰엄마가 전부였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친할아버지, 친할머니께서 돌아가셨고 사촌들도 모두 오빠들과 남동생뿐이다. 명절이 되어 부산 친가에 가면 언니와 나는 삼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곤 했다.


외가 쪽에는 이모들이 많아 항상 왁자지껄했던 반면 친가에서 아빠와 큰 아빠, 삼촌들이 모이면 오랜만에 본 사이라도 묘한 정적이 흘렀다. 아빠 형제들은 다들 점잖고 말 수 없는 성격에 170~5cm 전후의 키에 보통 체격, 모두 안경을 쓰고 평범한 직장에서 자기 일을 성실히 하는 특별히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이다. 한 분만 빼고 말이다.


아빠 바로 밑에 동생인, 5형제 중 셋째인 삼촌(삼촌은 결혼을 하지 않으셨다)은 180cm가 넘는 큰 키에 다부진 체격, 시원시원한 성격에 걸걸한 말투, 호탕하게 웃는 모습이 특징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삼촌의 트레이드 마크는 뒷목을 감싸는 정돈되지 않는 긴 흰머리였다. 5형제를 나란히 세워 놓고 본다면 같은 뱃속에서 나왔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삼촌은 형제 중에서 단연 튀는 존재였다. 정적인 일을 하는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삼촌은 운동을 좋아해 태권도 사범 일을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중학생이 될 즈음 삼촌은 폴란드로 홀연히 떠나셨다. 그 후로 삼촌은 나에게 '폴란드 삼촌'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는 폴란드에서도 태권도 사범으로 외국 학생들을 가르쳤고 가끔씩 주변 유럽 국가를 오가며 구경했던 풍경 사진을 언니와 나에게 보내주곤 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는 삼촌을 보고 엄마는 '삼촌은 역마살이 끼었나 보다. 늙어서 처자식도 없이 어찌 살려고...... 돈이나 좀 모아놓지. 어쩜 저리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지 몰라.'라고 걱정 어린 투로 자주 말씀하셨다.


삼촌은 다른 사람을 앞에선 무섭고 단호한 사람이지만 조카들 앞에서는 다른 삼촌과 달리 잘 웃고 말하기를 좋아하셨다. 특히 자신이 하는 일과 경험을 자주 이야기해 주셨고 말끝에는 항상 호탕한 웃음이 함께했다. 내가 어느 정도 크고 나서야 삼촌의 말속에는 약간의 허풍기가 섞여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촌의 경험담을 듣는 게 재미있고 좋았다.


또한 그의 가방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삼촌 성질에 트렁크는 못 끈다’라고 하시며 항상 어깨에 커다란 가방 2-3개가 매고 다녔다. 그런 가방을 메고도 어깨가 멀쩡한 걸 보며 역시 체육인은 다르구나 싶었다. 그 무거운 가방 중 한 개는 항상 선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비행기나 공항에서 살 수 있는 소라 모양으로 틀을 낸 초콜릿과 다양한 유럽 과자, 폴란드 차 종류가 대부분이었다. 그중에서 언니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단연 초콜릿이다. 마트에서 파는 초콜릿과 맛의 차이는 모르겠으나 그때까지 비행기를 타보지 못했던 나는 외국에서 건너온 것만으로도 그 초콜릿은 특별했다.


여느 때와 같이 삼촌은 가방에서 선물 보따리를 풀었고 그날은 처음 보는 비디오테이프도 함께 꺼내셨다. 그 비디오 겉면에는 영화배우 안성기 님의 사진과 더불어 <이방인>이란 글자가 쓰여 있었다.


''알라야, 삼촌이 드디어 영화에도 나왔다. 이건 안성기가 나오는 태권도 영화인데 삼촌이 여기에 잠깐 나오니 꼭 봐라.''


삼촌은 마치 영화배우라도 된 듯 자랑스러운 말투와 들뜬 표정으로 테이프를 우리 가족에게 건네셨다. 이 영화는 태권도 사범 역할을 맡은 안성기 님이 유럽 여러 나라를 다니며 태권도를 가르치고 해외생활을 하면서 겪는 고독감, 외로움을 그린 작품으로 폴란드에서 그 여정을 시작하는 설정이었다. 나는 ‘우와~삼촌이 영화에 나오시다니’라며 삼촌이 자랑스러웠지만 솔직히 국민배우인 안성기가 나오지 않았다면 삼류 영화인 줄 알고 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우리 가족은 결국 삼촌도 볼 겸 안성기 님도 볼 겸 네모난 상자 모양의 테이프를 VCR 기계에 미끄러지듯 넣었다. 영화가 그다지 재미있지 않아 우리 가족은 스토리보다 오로지 삼촌찾는 일에 열중했다. 검은 머리와 노란 머리의 사범들 사이에서 혼자 흰머리가 희끗희끗 나있는 삼촌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안성기 님 뒤에 서있는 여러 태권도 사범님 중 한 분으로 약 3분간 화면에 비쳤고 목소리는 아예 들을 수 조차 없었다. 삼촌은 이 테이프를 우리 집 가보로 남기고 싶을 정도로 소중히 여기길 바라셨고 자식이 없는 삼촌을 대신해 우리가 대신 보관하기로 했다. 그 후로 <이방인> 테이프는 그 존재를 잊은 체 우리 집 책장 아래 구석진 곳에 먼지와 함께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한 번도 그 자리를 비운적이 없었다.


삼촌은 약 8년 전 형네인 우리 집에서 두어 달간 지내시다 폴란드로 가신 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삼촌과 나는 주로 카카오톡으로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내가 베트남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해외 생활을 하신 삼촌은 조카가 걱정이 되었는지 번호까지 매겨가며 장문의 메시지를 남기셨다.


1. 처음 외국 생활은 힘들고 어려움이 많다. 그리고 그것들을 참고 해쳐 나가야 한다.
2. 한국 사람들을 조심해라. 외국에서 생활하면 다 똑똑하고 잘 나간다고 생각한다. 사기꾼들이 많으니 조심해라.
3. 베트남 사람도 조심해라. 사기꾼들 많다.
4. 아이들 한국 사범이 하는 태권도 체육관 보내라.


비록 메시지로 받았지만 삼촌이 꼭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삼촌 특유의 말투가 그대로 전해졌다. 나는 이 말을 명심하며 지금까지 하노이에서 무탈하게 지내고 있다.


그 후로 삼촌이 아프시다는 얘기를 들은 건 얼마 전인 7월 초였다. 삼촌이 현재 위독한 상태라 병원에서조차 치료가 어렵단 얘기를 엄마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리고 건네받은 사진 속에는 삐쩍 마르고 힘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삼촌이 보였다. 현지 선교사님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했다. 항상 씩씩하고 건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삼촌은 이빨 빠진 호랑이 마냥 힘없는 백발노인이 되어 누워계셨다. 타지에서 그것도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 하나 없이 외롭게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삼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삼촌.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시다고 들었어요. 먼 타국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어요.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희망을 잃지 마시고 좋은 생각 하면서 이겨나가요. 할 수 있어요.

내가 메시지를 보내면 삼촌은 항상 ‘고맙다 조카’라고 짧은 답장을 주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연락이 없다. 답장은 안 보내셔도 되니 확인이라도 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날, 또 그다음 날, 그 다 다음날에도 계속 메시지 창을 확인했다.


결국 삼촌은 2021년 7월 20일 66세의 나이로 이국 땅에서 먼 길을 떠나셨다. 내가 보낸 메시지 옆에 '1'은 이제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숫자가 되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삼촌과의 대화 창을 놓을 수가 없다. 현재 나에겐 삼촌을 추억할 수 있는 건 <이방인> 비디오테이프와 삼촌과의 메시지 창일뿐이다. 삼촌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벌써 그립다. 삼촌 정말 사랑해요.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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