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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자라는알라씨 Jul 27. 2021

결국 내 마음이 문제였다

비록 엉망일지라도

청소 후 10분이 지나면 우리 집에는 희한한 광경이 펼쳐진다. 식탁과 거실 곳곳에는 과자 부스러기가 떨어져 있고, 장난감은 다시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으며 침대 위에는 책장 위에 있던 온갖 인형들이 다시 나와 있다. 분명히 아까 청소를 한 기억이 있는데 안 한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 건 왜 일까.


코로나가 심해진 후 아이들과 함께 붙어 지내며 3개월이 지났다. 요즘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아이들과 나는 마치 한 몸처럼 24시간을 붙어 다닌다. 마트 갈 때는 물론이거니와 작은 택배 상자 하나 받으러 갈 때도 아이들은 ‘나도 갈래’하고 따라나선다. 목욕도 같이하고 심지어 양치질, 세수할 때도 ‘엄마랑 같이 래’하며 내가 따라나서야 아이도 발걸음을 옮긴다. 카페에서 혼자 여유롭게 커피 한 잔 하며 책을 보던 시절은 벌써 꿈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지금은 내가 직접 만든 라테에 얼음 동동 띄워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노는 소리를 배경 삼아 책을 보는 일은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항상 조용한 곳에서 책을 읽어야 했던 나는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야. 다 적응하게 되어있어’라는 말의 위력을 다시금 실감 중이다.


내가 거실에서 책을 보는 사이 가끔씩 방을 들여다보면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아이들은 청소 후 아직 정리되지 않은 매트리스를 가지고 다양한 놀이 방법을 연구한다. 우선 미끄럼틀을 만든다. 거기서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더 잘 미끄러질지 자기들 머리를 맞대고 궁리한다.

‘잘 안 내려가네. 아하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아님 이걸 깔아볼까?’

어느새 장롱에서 이불은 죄다 꺼내 매트 위에 덮었을 때 더 잘 내려갈 수 있는 매끌매끌한 이불을 찾는다. 자체 제작 미끄럼틀을 타는 데는 고작 1초. 눈 한번 껌뻑하면 끝이다. 1초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아이들은 힘들게 미끄럼틀을 만들고 이불을 꺼낸다(나 같으면 안 한다). 그래도 까르르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 걸 보니 대만족인 모양이다. 비록 1초짜리 미끄럼틀이지만 말이다. 곧이어 미끄럼틀은 썰매장으로 변신한다. 베개는 썰매가 되고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베개 앞 죽지를 잡고 위로 치켜들면 앞으로 잘 내려가는 걸 터득했다. 내가 쳐다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아이들은 ‘엄마는 이제 가’라고 한다. 듣던 중 제일 반가운 소리다. 또 엄마를 찾을 때까지 난 내 할 일을 하고 있으면 된다.


미끄럼틀장과 썰매장이었던 안방은 한 시간 후면 레스토랑으로 변신한다. 물론 매트와 이불이 한데 엉켜진 상태로 말이다. 이번에 책까지 한아름 쏟아져 나와있다. 어느새 앞치마와 두건을 두른 아이들은 레스토랑 사장님으로 변신 후 나를 찾아온다.  

“엄마 저기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레스토랑이 열었대. 엄마가 손님으로 와야지”

“혹시 거기 배달되나요?”

“안돼요. 직접 가야 해요.”

어떻게든 엉덩이를 붙이고 싶었으나 실패다.


“여기 메뉴판이요.”

“여기 뭐가 제일 맛있어요?”

“피자, 스파게티, 케이크 다 맛있어요.”

“그럼 커피와 케이크 한 조각 주세요.”

난 먹는 시늉을 하고 '이따 또 올게요'하고 다시 익숙한 내 자리로 향한다.


아이들이 엄마에게 바라는 건 큰 게 아니었다. ‘왜 이렇게 엉망으로 하고 놀아’라는 잔소리가 아닌 오로지 놀이에 몰입해 맞장구 쳐주고 몇 마디 거들어 주면 되는 것일뿐. 엄마가 주도해 놀이를 새로 만들라는 것도 아니요, 그저 뭐 하고 있는지 가끔 들여다보며 ‘잘 놀고 있구나’ 한마디면 된다.


아이들이 재미있게 노는 모습을 보니 2-3년 전의 내가 생각나 부끄러웠다. 그 당시 나는 직장에서 돌아온 엄마와 놀고 싶은 아이의 마음을 읽기보단 집안이 엉망인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치워야 한다는 생각에, 정리해야 된다는 생각에 아이들에게 ‘그만해, 하지 마, 안돼, 빨리 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하지 말라는 나와 하려는 아이와의 실랑이로 매일이 전쟁터 같았다. 이 아이들은 나를 힘들게 하려고 태어난 아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당시 내 목표는 오로지 전쟁 같은 하루를 빨리 끝내고 쉬는 것이었다. 그러니 내 마음 시계는 실제 시간보다 1~2시간이 빨랐다.

퇴근을 할 즈음에는 ‘집에 가서 아이들 하원 시키고 밥해야지’

밥을 먹이고 있으면 ‘언제 설거지하고 집안 치우지?’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아이들 씻기고 얼른 재우자’


내 계획에서 아이들이 어긋나기만 하면 나는 불같이 화내는 사람으로 변했다. 그러니 아이들과 제대로 놀아줄 여유가 없었다. 설거지를 하는 내 옆에 붙어 같이 놀자는 아이의 부탁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이 문제였다. 남편의 해외 발령으로 오로지 혼자 두 아이를 양육해야 했던 시절, 학교에서 하루 종일 말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쯤 난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 상태에서 집으로 두 번째 출근을 하면  한참 손이 많이 가는 5살, 3살 아이는 나를 한시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모든 걸 잘해야 한다는 완벽함에 내가 이 아이들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나는 항상 긴장상태였다. 다른 데를 돌아볼 여유도 나 자신을 위한 사치도 허락되지 않았다. 전혀 행복하지 않고 우울했다.


 지금은 책을 읽고 사색을 하고 글을 쓰는 등 나만의 취미를 찾으면서 마음의 공간은 훨씬 넓어졌다. 그 결과 어질러진 집안 대신 아이들의 표정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무엇을 하고 싶은 지, 무엇을 먹고 싶은 지. 아이들이 놀고 싶으면 ‘놀아’하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하면 ‘먹어’ 한 마디만 평화가 찾아온다. 그렇다고 내가 매번 아이들에게 한없이 너그러운 엄마도 아니고 완벽한 엄마는 더더욱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집안에 한 바탕 폭풍이 휩쓸고 갈지라도 과자 부스러기를 흘리고 다닐지라도 난 더 이상 그걸로 스트레스받지 않는다. '이따가 치우지 뭐. 오늘 아니면 내일 하지 뭐.'라며 마음의 여유가 생길 만큼 나는 성장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모습 그대로다. 다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달라졌을 뿐. 결국 내 마음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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