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복도에 있는 스피커에서 웅성웅성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소리. 들었다 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베트남어만이 나올 뿐이다. 요즘은 방송으로 들려오는 베트남어 소리가 유일하게 내가 베트남에 있는지를 깨닫게 해 준다. 사람을 마주치거나 또 그들이 말하는 걸 들은 지도 오래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된 후 부쩍 아파트에서 방송이 자주 나온다. 어느 라디오 방송의 뉴스를 틀어놓은 건지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광고, 아파트의 시그니처 음악들이 섞여 들려왔다. 꼭 80-90년대 우리나라에서 재난과 같은 비상상황이 발생했을 때 ‘라디오를 켜고 상황을 주시하시기 바랍니다’ 던 뉴스 앵커의 말이 생각났다. 혹시 아파트 방송에서 나오는 말도 그런 의미일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마트 외엔 집 밖을 나가지 않은 지 2주가 흘렀다. 하노이는 최고 단계인 ‘16호 명령에 따른 거리두기’가 시행된 후 모든 게 멈추어 있다. 필수적으로 나가야 하는 일터에 가기 위해서는 길을 막고 있는 공안들에게 공공기관에서 승인받은 '통행증'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 인증된 통행증이 없으면 꼼짝없이 집에 갇혀야 하는 신세다. 그래서 잠깐 동네에서 운동을 하다가 공안들에게 잡혔다는 이야기, 식재료를 사러 다른 동네에 갔다가 공안들에게 다시 돌아가라고 들은 이야기 등 웃픈 이야기가 하루 걸려 들려온다.
롯데마트에서 배달 온 식재료를 받으러 1층 현관 밖으로 나갔다.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경비원은 ‘어디를 가는 거지?’란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대며 내 동선을 따라 다니는게 느껴졌다. 그는 내가 곧 짐을 들고 들어오는 걸 보고선 안심하는 눈치다.
밖에는 초록색 제복을 입은 공안 몇몇이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나에게 짐을 건네 준 배송기사에게 무언가를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아마도 통행증을 확인하는 것 같다. 배송기사의 눈빛에는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가끔 나는 그들이 나라를 지키는 경찰이기보단 시민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들을 보면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나오는 엄석대의 얼굴이 떠오른다. 학생임에도 교사와 같은 권위를 휘두르고 말 한마디에 반 친구들이 위협감을 느끼는 존재였던 그처럼 말이다.
하노이에 오고 얼마 후 베트남이란 사회에서 공안들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깨달은 사건이 있었다. 친구네 아이들과 함께 집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게 밖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공안들이 들이닥친 거다. 꼭 북한 군인을 연상케 하는 초록색 제복에 초록색 모자,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는 얼굴, 근엄하고 냉철한 눈빛, 위협적인 말투. 그들은 아이스크림가게뿐 아니라 옆에서 사탕수수즙(미아)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네 가게에 있는 야외 테이블과 의자도 마구잡이로 차에 싣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 가게 주인과 아주머니는 의자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 천막으로 가리기 바쁠 뿐 공안들에게 ‘왜 가지고 가는지’를 묻거나 따지며 대드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테이블과 의자가 실린 차를 바라볼 뿐이다. 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이게 사회주의의 위력인가. 그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경찰도 아닌 동네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선량한 시민들을 괴롭히는 동네 불량배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들은 시민들에게 두려움 그 자체였다.
그날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방송에서 계속 흘러나왔다. 아파트 한국 주민 단톡방을 보니 ‘통행증’을 나눠주니 얼른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우선은 ‘받아 놓자’란 생각으로 마스크를 쓰고 1층으로 내려갔다. 1층 야외에서는 베트남 여성 두 분이 의자에 앉아 계셨고 그 앞쪽 바닥에는 테이프로 줄이 그어져 있었다. 거리두기를 하라는 의미 같았다. 내 차례가 되니 그 여자분은 종이를 건네주며 어디에 사는지 동과 호수를 적으라고 했다. 동과 호수를 적으니 빨간색 도장이 찍힌 종이 한 장이 건너왔다.
처음으로 받아본 '통행증'이란 존재에 어리둥절했다. 내가 통행증이 있어야 외출할 수 있는 날을 경험하게 될 줄이야. 이곳 하노이에서 또 어떤 신기한 일이 더 남아있을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다. 알 수 없는 베트남어 사이에서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이 종이의 정체를 짧은 영어로 띄엄띄엄 설명해주었다. 내용인 즉 슨, 정해진 날짜인 8월 1/3/5/7일에만 부득이한 사정에 의해 외출할 수 있으며 외출할 때에는 이 통행증을 들고 다녀야 한다는 의미였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날리며 한마디를 했다.
“Mart? No problem.”
집 앞 마트는 자유롭게 갈 수 있단다. 그녀의 말을 듣고 마트는 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안심해야 하는 건지 마트 외엔 갈 수 없는 현실을 슬퍼해야 하는 건지 헷갈렸다.
아파트에서 나눠준 통행증. 정해진 날짜에만 이동할 수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현지 마트인 빈 마트(Vinmart)로 식품을 납품하는 업체에서 대거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식품업체가 공급한 마트에는 내가 자주 이용하는 마트 지점도 떡하니 적혀 있었다. 다른 동네 K-마트(한인마트)에서도 배달직원이 확진되는 바람에 영업이 중단된 사태가 발생했다. 아뿔싸. 유일한 외출이었던 마트도 자유롭지 다니지 못하는 신세가 될까 봐 두렵다.
거리두기가 시행된 후 2주가 지났지만 여전히 8.7(토) 기준으로 7000명대의 확진자가 나오고 있다. 호치민, 하노이는 감소한 반면 동나이 지역에서 대거 확진자가 발생한 모양이다. 결국 하노이시는 “16호 명령에 따른 거리두기”를 15일간 더 연장하기로 했다. 거리두기 그 자체보다 시민들의 자유를 억압할 수밖에 없는 이곳의 열악한 의료시설에 한 숨이 절로 나온다. '여기서 코로나 걸리면 그냥 죽으러 가는 거랑 같아'란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집에서 바라본 창 밖의 풍경은 어린아이의 미소처럼 해맑아 보인다. 과연 ‘코로나’라는 게 있는지 의심될 정도다. 창밖을 바라보며 남편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밖에 날씨 정말 좋다. 하늘도 맑고. 이런 날 집에만 갇혀 있어야 한다니. 이렇게 맑은 하늘은 하노이에 와서 처음 보는 것 같아.”
“지금 차랑 오토바이가 안 다니잖아.”
“아…….”
그동안 하노이의 미세먼지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좋은 점은 하노이의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점이고 아쉬운 점은 단지 그 맑은 하늘을 집안에서 바라보기만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코로나와 미세먼지가 없는 하노이를 마음껏 즐기는 날을 하루 빨리 마주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