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창문으로 바라본 세상은 회색 빛깔에 우중충했다. 아무래도 비가 오는 모양이다. 이맘때가 동남아는 우기라고 했던가. 내가 처음으로 본 하노이 하늘에선 하염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도착했음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대부분 한국인이었던 승객들은 짐을 꺼내느라 분주했다. 내 두 손은 모두 두 아이의 차지가 될 거기에 모든 짐은 화물칸에 실었다. 머리맡에서 짐을 꺼낼 필요 없이 나는 아이들의 손을 놓칠세라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이국땅에 발을 디뎠다.
2년 전 이맘때인 2019년 8월 20일. 나는 당시 5살, 3살 아이 둘을 데리고 처음으로 베트남 하노이에 왔다. 하노이는 한국사람들이 여행으로 많이 가는 곳이라지만 나에겐 생전 처음이었다. 그전에 여행으로 왔다 할지라도 잠깐 왔다 가는 여행과 몇 년 동안 거주할 예정으로 올 때랑은 또 다른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맨 먼저 물기를 잔뜩 머금고 숨을 턱 막히게 하는 더운 공기가 우리를 반겼다. 비가 와서 인지 마치 사우나에 온 듯한 끈적끈적함이 온몸에 느껴졌다. 비행기에서 막 발을 뗐을 뿐인데 벌써부터 샤워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와~ 내가 정말 베트남에 왔구나'가 실감나는 순간이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문 앞에서 5개월 전에 먼저 떠난 남편이 우리를 기다리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와중에도 내 눈은 익숙한 얼굴을 순식간에 찾아냈다. 아이들과 낯선 땅에 홀로 남겨졌다는 불안감은 남편 얼굴을 보자마자 금세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보는 아빠를 보고 한걸음에 달려가 와락 안겼다. 반면 나는 5개월 만에 만난 남편이 왠지 어색했다. 부부는 떨어져 살수록 남처럼 느껴진다고 했던가. 5개월의 간격에도 이런 감정이 드는데 3-4년 이상 떨어져 살다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부부보다 부모 자식 간에 맺어진 혈육의 정이 얼마나 진한지 다시 한번 느꼈다. 남편은 내가 두 아이를 데리고 입국 수속 시 긴 줄을 서야 하는 일과 짐 찾는 일이 걱정되었는지 VIP가 올 때나 한다는 의전 코스를 신청한 모양이다. 남편은 의전인 신분으로 입국장 안까지 들어와 있었고 그 옆에는 공항 관계자라는 사람도 함께 있었다. 가뜩이나 들떠있던 내 마음은 VIP 대접을 받는다는 생각에 걷잡을 수 없이 하늘 높이 붕붕 떠올랐다. 짐을 찾기 전까지 말이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5개월 만에 다시 완전체가 되었다.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시작. 비록 낯선 곳이지만 가족과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거란 근거 없는 자신감과 설렘이 몰려왔다. 설렘을 동반한 긴장감은 항상 나를 기분 좋게 만든다.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어떤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까?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이런 설렘은 복병 코로나를 만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금방 공항을 빠져나갈 것이란 예상은 짐 찾는 과정에서 보란 듯이 어긋났다. VIP 대접을 받는다고 풍선처럼 부풀었던 내 마음도 금세 푹 꺼졌다. 우리 짐이 짐칸 가장 구석에 있었던 걸까? 당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남편과 아이들 얼굴에 땀이 한 두 방울 맺히기 시작했다. 아이들 표정에도 아빠를 만났다는 설렘은 그사이 온데간데 없고 힘들고 지친 기색이 대신 드리워져 있었다.
성격이 급한 나에겐 하노이 시계는 한국보다 2-3배는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짐이 늦게 나와도 재촉하는 사람도 화내거나 짜증 내는 사람도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언젠간 나오겠지’라는 느긋함으로 기다렸다. 우리와 같은 한국인만 빼고. 베트남처럼 더운 날씨가 특징인 동남아시아 지역에 거주하기 위해선 가장 필요한 것이 ‘인내심’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사람이 많지 않은 카페에서조차 커피 한 잔을 시키면 10~15분은 기본으로 기다려야 하기에(취소할까 말까 할 때쯤 나온다). 우리는 거의 40분을 기다린 후에야 옷가지가 든 가방과 한국의 맛을 담아온 박스가 빼꼼히 모습을 드러냈다.
집 새로 알아보기, 유치원 알아보기, 장보기, 한국에서 짐 오면 정리하기 등 현실적인 일정이 연이어 기다리고 있었기에 첫날만은 하노이에서 느낄 수 있는 이국적인 풍경과 낭만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그러기엔 음식이 최고다. 어서 하노이 맛을 보러 가자!
첫날 저녁식사는 대표적인 베트남 음식인 쌀국수와 Banh xeo(반쎄오), 볶음밥, Nem(넴)을 먹기로 했다. 한국보다 저렴한데 곱절로 맛있었다. 한국에서도 충분히 맛볼 수 있는 음식이라지만 현지에 와서 그 분위기와 어우러져 먹는 맛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순간 이렇게 맛있는 베트남 음식이라면 매일 먹고살아도 될 것만 같았다(물론 며칠 후부터 한국 음식이 그리워 쭉 한식을 먹고 있고 가끔씩만 베트남 음식을 먹는다).
그 후 어딜 가든 베트남 음식 대부분은 나와 아이들 입맛을 사로잡았다. 우린 보통 Pho bo(소고기 쌀국수)와 Pho ga(닭고기 쌀국수)를 먹었다. 국수도 넣는 고기에 따라, 고기를 익힌 정도, 면의 굵기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후에 맛본 젓갈 소스에 생선을 찍어 먹는 Cha ca(짜까), 느억맘 소스에 국수와 숯불고기를 찍어 먹는 Bun cha(분짜), 국수에 야채와 마늘 후레이크 등을 넣어 소스에 비벼 먹는 비빔국수인 Bunbonambo(분보남보)까지. 맛은 맛있다는 말로는 입 아플 지경이고 저칼로리이면서 건강식이며 소화 또한 잘됐다. 왜 베트남 사람들이 다들 날씬한지 그 이유를 알정도다.
그때가 그리워서 몇 자 끄적여봤다. 어서 코로나가 잠잠해져 한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이 음식들을 맛볼 수 있는 날이 다시 오길. 다음 <베트남에 사는 여자> 매거진에 코로나 소식보단 기분 좋고 구미 당기는 글을 어서 쓰고 싶다.
베트남 음식들. 왼쪽부터 다양한 스타일의 Pho bo (쌀국수)1,2 Bun cha(분짜)
왼쪽부터 Cha ca(짜까,생선요리),Nem(넴, 숯불돼지고기 꼬치구이), banh xeo(반쎄오, 라이스 페이퍼에 각종 야채와 해산물을 넣어 부친 전과 야채를 싸먹는 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