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의 뜨거웠던 마라톤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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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철원은 6.25시절 북한군 치하에 들어간, 김화읍,갈말읍등 낯선 이름의 상처 많은 슬픈도시로 기억되는 곳이다. 평야 옆 낮은 구릉과 멀리 겹쳐져 물러난 산과 산들은 총성이 멎은지 이미 오래다. 어제 이곳에서 우리는 폭염의 도시로 달려나갔다.
너무 뜨거워 화상을 입고 달궈진 얼굴 위로 사나운 땀이 흘러내렸다. 그것들은 달리는 내내 눈속으로 쉼없이 들어갔고 마치 눈물을 닦아내는 사람처럼 주먹손을 자꾸만 흠쳐야 했다. 자동차 윈도브러쉬는 한 손가락만 끄덕이면 그만인데 내 눈동자는 흐르는 땀으로 고통을 수반했고 거친 호흡과 함께 힘에 겨웠다. 비가 왔으면 싶었지만 그런 희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 희망이라도 가져야만 내 육체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고 이해할 수 없이 달리는 저 많은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한 줌의 위안이라도 갖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스크럼을 짜고 달리는 시위대의 물결처럼 촘촘했고 주로는 이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엔 한없이 작았다.
몇 년간 달리기에 접근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늦은 저녁 낭만을 사랑했을 때였고 깊은 사랑 앞에서 오랜시간을 헤메고 다녔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달리기가 욕망이었고 그런 욕망은 어느 순간 사라지기 시작했다. 불어난 체중 때문이기도 했고 나태함 이기도 했다. 달리는 소속 선수들에게 이건 영 실례가 아닐 수 없었다.
하프코스 주자들을 태운 셔틀버스는 20여분이 지나자 민통선을 지났고 다시 10여분을 달려가 월정리역 평화문화 광장에서 차를 멈췄다. 광장은 넓었으나 주로는 좁았다. 휘마동 하프주자들은 모두 뒤쪽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좁아진 주로에서 한동안 거북이 걸음을 해야했다. 좁은 주로에서 사람들을 요리저리 피하고 구석으로, 가운데로 힘겹게 빠져나갔다. 후배들이 너무 빠르다고 했으나 추월하는 재미는 쏠쏠했다. 전날 과음을 했음에도 이렇게 몸이 잘나가니 내 자신도 신비스러울 뿐이다.
5키로~ 10키로 별로 힘들지 않다. 아니 펄펄 날것만 같다. 새벽 훈련덕분에, 홀쭉해진 몸 덕분에 힘겨움은 거의 느낄 수 없었다. 몇 개월 전만해도 숨이 턱턱 막혀 10키로 대회에서도 걷기만 했는데 스스로도 놀랍다.
이제 15키로 정도 지점이다. 산들은 낮고 철원평야는 공손했으나 내 몸은 적당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고행 길이다. 19키로를 넘어서자 모든 것이 불편해졌다. 초반에는 내 몸과 정신은 하나가 될 수 있었지만 꿈을 한 조각도 꾸지 못한 불면의 밤처럼 내 몸은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역시나 거리의 중압감이 몰려온다. 펼쳐진 논과 낮은 나무들은 흑백사진처럼 보이고 이어진 길은 재미없는 시나리오를 연출하는 소품처럼 보일 뿐이다. 고통이 몰려오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 고통을 사랑해야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주로에서 어지럽게 퍼져 있었다. 걷는 사람, 뛰는 사람, 다리를 절룩거리는 사람. 하지만 그들은 웃지를 못할 뿐이지 확실한 직선을 그리며 달리고 있었다. 나도 그 속에 있었다.
출발한지 1시간이 넘었고 40분이 지나고 있었다. 하늘가득 바람이 불기 바랬지만 야속하게도 내 소망은 이루워지지 않았다. 이제 뒤로 돌아갈 처지도 안되고 앞으로 앞으로 가야만 태양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태양이 이렇게 싫어본 적은 별로 없었다. 유니폼도 끓는 물에 적셨다 꺼낸 종이처럼 꽤나 뜨겁다.
골인지점이 이제 얼마남지 않았다. 고석정 아치가 보였고 전력질주를 했다. 1시간 51분 6초… 오랜만에 받아보는 좋은 점수다. 전체 순위 상위 10% 정도 되니 이만하면 모의고사는 잘 본거 같다. 그 점수는 골인과 동시에 많은 위안을 줬고 물품을 찾은 뒤 뒷 구석에서 담배연기를 한없이 맛있게 말아 올릴 수 있었다. 하늘을 쳐다보며 나도 모르게 주름진 이마 사이, 입술,눈섭 사이로 살며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휘청거리는 몸은 나무의자가 받아주고 나뭇잎 사이로 태양은 차갑게 조각 나고 말았으니 바라던 바람이 슬며시 몰려온다. 소망이 이뤄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