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서 지켜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노트르담 성당이 불타자 세계인들은 경악했다. 이는 노트르담의 성당이 프랑스 혹은 카톨릭만의 유산이 아님을 알려준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는 독일군 장교가 쇼팽을 연주한 유대인 피아니스트를 살려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쇼팽이 단지 폴란드의 작곡가가 아니라, 유럽과 서양 문화의 유산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앞의 내용은 철학자이자 본 책의 역자인 이성민의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을 참고했다.)
<정신의 고귀함>의 표지에는 자유의 여신상의 횃불이 그려져 있고, 이 책의 서두에 나오는 대화 역시 여신상이 있는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은 인류의(더 정확히는 서양의) 문명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 있으며, 자유의 여신상은 그 상징 중 하나이다. “인간은 야만 상태로 태어난다. 인간은 문화 덕분에 야수 상태에서 구제받는다.”(p. 151)
하지만 이러한 문명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야비한 지식인들은 911 테러를 문명의 파괴가 아닌 피해자들의 “어쩔 수 없는 저항”으로 묘사했다. 사르트르는 소련 내에서 일어나는 반인륜적인 행위들을 묵인했다. 허무주의자들은 폭력과 대량 살인을 거부할만한 도덕적 능력이 없다. 이 같은 상황에서 선과 악의 구분은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나는 최근에 정치적 동료들을 만났고, 새로운 사상을 창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다. 나는 이 일이 매우 중요하며 시대에 필요한 일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사실 나의 진정한 관심은 이념과 사상 너머에 있다. 칼 슈미트의 정의에 따르면 정치는 “적과 동지의 구분”이지만, 문명은 정치를 넘어 인류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무언가를 상정한다. 이것이 내가 사회과학을 전공했지만, 인문학에 더 끌리는 이유이다.
리멘은 여러 대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정신의 고귀함”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러한 이상은 귀족주의적이지만, 이 고귀함은 혈통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정신에 달린 것이다.(p. 152) 과연 오늘날에도 고귀함을 위한 대화가 이어질 수 있을까? 그리고 사람들은 정신의 고귀함을 가지고 만연한 적대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 어쩌면 자유의 여신상이 높이 치켜든 횃불이 구원을 위해 바라보아야 할 놋뱀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