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수다글꽃나들이]
바람이 시원하다. 그저 조금 걸었을 뿐인데 기분 좋은 땀이 쪼로록 맺힌다. 그렇지, 땀 기운이라도 들어차야 바람 맛이 나는 거지. 이름도 고운 글꽃나들이, 보기에도 시원한 초록의 한라수목원에 자리를 펼쳤다. 이 아침에 내가 걷게 될 줄이야. 사람이란 게 원래 잘 안 변한다는데 이 아침에, 심지어는 나를 걷게까지 만든 글수다의 힘! 시원찮은 내 무릎을 걱정한 팀의 배려로 내 속도에 맞춰 슬렁슬렁, 누가 봐도 운동이랄 것 없는 움직거림이지만 그래도 나만 혼자 괜히 마음이 뿌듯해진다.
두툼한 몸통을 자랑하는 대나무들의 숲, 바람 소리가 레이스 흩날리는 풍경처럼 들린다. 저렇게 곧고, 바르게, 흔들림 없이, 저 아득한 하늘을 향한 대나무들의 거침없는 웅변이라니. 누구라도 이 대나무 숲에서 마음의 소리를 꺼내놓는다면 기꺼이 하늘에 그 마음을 고스란히 전해줄 것만 같다.
갈라져 제 몸 추스리기도 바쁠 매실 나무는 아무렇게나 트멍으로 날아와 자리잡은 흙을 품고 여린 초록을 피워낸다. 마치 원래부터 그 초록들은 거기에서 시작되어야 했었던 것처럼. 자신의 힘든 자리도 포근한 생명밭으로 내어주곤 무념히 열매를 길러내는 매실나무의 꿋꿋함이 굽은 가지 속에 빛난다.
하얀 꽃대궐을 만든 가는잎조팝나무 꽃가지는 땅으로 땅으로 순리에 따른다. 거품 인 비누방울처럼 잔잔한 흰꽃잎이 몽글몽글 모였다. 휘어진 꽃가지에 서로에게 기댄 채 하늘바라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예쁘게 필수록 순리를 따르는 꽃의 겸손과 진심을 나는 따라갈 수 있을까.
낮은 돌담에 색색이 다른 나뭇잎을 올려놓는다. 나무마다 어여쁜 잎들이 짧은 비행을 꿈꾸고 떨어져 내린 잎들은 지상의 현실을 마주한다. 색이 바래고 빠져 왕년의 모습은 찾을 길 없이 바싹 쪼그라들고 둥글게 말린 나뭇잎, 아직은 붉은 기운을 애써 붙잡고 있는 나뭇잎, 본연의 초록에 꼿꼿이 머문 채 나 아직 여기 있다고 말하는 듯한 나뭇잎까지. 지상에서도 그들의 삶은 또 이어진다.
온통 초록의 소리로 씻긴 마음, 서두를 것도 조급할 것도 없이 그저 나로 꽉 찬 오전 한 때.
천천히 걷는다. 내 속도에 맞추는 이런 산책이 좋다. 오늘 하루는 나의 속도로 맞춤한 기특한 시간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