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제주에 내려온 후 우리 남매들만의 소꿉놀이 같은 자취 생활이 시작되었다. 중학생인 나와 고등학생이었던 작은 오빠, 그리고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언니. 방 2개짜리 자취방에 부엌이 달린 집이었다. 긴 마루를 사이에 두고 할머니, 할아버지 내외가 사시던 창문으로 들이치는 따듯한 햇볕이 아직도 기억난다.
지금 우리 큰아들래미가 19살! 자기는 다 컸다고 독립도 자신하지만 옆에 두고도 늘 걱정이 되는 게 부모의 마음이다. 아버지는 우리를 이 제주에 보내고 얼마나 속을 끓이셨을까? 이제서야 그 마음을 헤아려본다.
살림을 맡고 있던 것은 언니였다.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했던가? 언니는 큰딸이라는 이유로 어려운 형편이 되어서도 대학을 간 큰오빠와는 달리 당분간 우리들을 돌봐야 했다. 이 점은 지금까지도 우리 남매들이 언니에게 빚진 느낌으로 잊지 않고 있다. 물론 아버지도 형편이 좋아져서는 당시 대학을 못 보내 준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학비로 한꺼번에 언니에게 내놓으시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언니는 엄마가 온 집안에 숨겨 놓는 간식을 귀신같이 찾아내는 재능이 있었다. 그 재능이 자취 생활에선 무엇이든지 꽁꽁 숨겨 놓아 우리가 절대 찾아내지 못하게 하는 쪽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항상 모자란 생활비였지만 간혹 과자를 사다 놓았는데 그 작은 집에 숨길 공간이 어디 있다고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는 것이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당연히 이 먹는 것을 장악한 언니의 파워가 가장 셌다.
한 달에 한 번 아버지로부터 생활비를 많이 보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래도 잘 지내서 고맙다고, 지내기는 괜찮냐고 걱정과 당부, 미안함과 고마움이 마구 뒤섞인 장문의 편지와 함께 생활비가 오면 언니의 씀씀이가 조금 커진다. 돼지고기도 좀 사다가 구워 먹고 과자도 사다두기도 한다. 도시락 반찬은 또 어떤가? 통통한 오징어포 볶음과 소시지가 위풍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게 생활비 도착 1주는 화려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2주째에 들어가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반찬이 좀 간소해지고 자꾸 먹던 게 올라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밥을 먹을 수 있는 기간이었다. 물론 이때부터는 라면을 끓여 먹는 경우가 조금 늘어나게 된다. 쌀은 도시락을 싸야 했기에 적당히 아껴먹고 그 자리를 라면이 대신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도시락 반찬도 오징어포 대신에 얇디얇은 쥐포 볶음이 주가 된다. 오징어포나 쥐포나 뭐가 다르냐고 비슷하지 않냐고 하겠지만 그 차이는 크다. 얇디얇은 쥐포는 좀 비닐 같은 느낌이랄까. 게다가 비린내도 좀 싫긴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언니의 요리 솜씨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어쨌든 그 기억 때문인지 난 지금도 쥐포 볶음을 안 먹는다.
3주째는 그야말로 긴축이다. 이때부터 라면이 주식이 된다. 지금처럼 라면 종류가 다양했던 것도 아니고 사실 라면을 주식으로 먹는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 4주째 들어가게 되면 언니가 준비하는 게 있다. 바로 밀가루! 이제는 별미로나 먹을 수제비를 만들어 먹기 위해서다. 라면의 3주와 수제비의 4주! 더 힘든 건 라면의 3주였다. 라면의 3주는 영 지날 것 같지 않은 암담함도 느끼게 했다. 반면에 수제비의 4주는 이제 좀 견디면 다시 화려한 1주가 찾아오리라는 기대감이 훨씬 컸기 때문이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건 주인 할머니의 호떡이다. 주인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무슨 일이신지 자주 싸우시고 또 금방 사이가 좋아지시곤 했다. 할머니는 시장 앞 한쪽에서 호떡과 핫도그 장사를 하셨었다. 장사를 접고 집에 오시면 어김없이 남은 호떡과 핫도그 봉지를 방안에 들이밀어 주셨다. 그게 또 우리의 간식을 대신해주곤 했다. 얼굴만큼이나 컸던 꿀호떡과 쪼끄만 소시지가 겨우 담겨있는 저 큰 핫도그. 사실 처음에는 무지 반가운 간식의 역할을 다했으나 겨울 내내는 힘들었다. 제아무리 맛있는 거라도 이렇게 자주는 곤란한 것이다. 제발 할머니의 호떡과 핫도그가 완판 되기를 얼마나 간절히 빌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