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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무는바람 Jan 10. 2021

직업병이 도졌다

해마다 1월이면....

 새해를 맞이한 지 어느덧 열흘이 꿈같이 흘렀다. 한 해를 새롭게 다짐하고 계획을 세워보고 할 틈도 없이 마음만 바쁘게 2021년이 시작됐다.

 사실 12월이 되면 하나둘씩 마무리되는 수업들로 마음마저 넉넉해져서 매번 다음 해에는 수업 시간에 욕심 내지 말고 조금은 여유롭게 지내리라 불끈 다짐하게 된다. 이제는 그래도 될 때라고 생각하면서.... 지난 12월에는 그 마음이 더했다. 작년 한 해를 코로나로 있던 수업들도 하다 말다를 반복하고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수업이 없는 틈을 처음에는 휴가 받은 듯한 널널한 기분으로, 조금 지나서는 지루함으로, 더 지나서는 이러다 수업을 아예 하지 못하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함으로 마음을 제멋대로 출렁거리며 보냈기 때문이다. 수업 없는 그 여유로움은 나의 게으름을 슬쩍 건드렸을 뿐이고 나는 그 게으름의 단맛을 알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번엔 진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수입이 좀 줄더라도 넉넉한 시간표를 짜 보자고 생각했다. 독서 수업은 학교 하나 정도만, 그리고 새롭게 다문화교육센터의 노둣돌 강사(다문화 친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일이다.)에 도전해서 변화와 경력,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보자. 부르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틈틈이 스트레스 없이 치고 빠지는 단타의 특강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좋았어. 그럼 이번엔 확실한 한 학교에만 제안서를 내면 되겠다. 골라서 내보자. 음하하하, 골라서 내다니 생각만으로도 좋다. 10여 년 만에 여유로운 12-1월을 맞을 수 있겠어. 좋구나!



 하는 일이 강사라 한 해 한 해 계약을 해야 하고 서류를 내는 학교마다 다 계약을 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특수고용직군(나는 내가 특수고용직인 걸 나라의 코로나 지원을 받으면서 작년에야 알았다ㅜㅜ)이라 불확실함 속에서 여기저기 기웃거릴 수밖에 없다. 학교별 채용공고가 집중되는 12월, 1월은 나와 같은 강사들에게는 1년 간의 수업 농사를 결정짓는 시기이다. 수업을 하던 학교에서 채용이 안될 수도 있고 운이 좋다면 작년에 해오던 수업들을 그대로 이끌고 갈 수도 있다. 1차 서류를 통과해도 2차 면접 최종 합격 문자가 날아올 때까지 만에 하나 안 될 때를 대비해서 끝없이 채용공고를 들여다보며 플랜 1,2,3... 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하나 둘 수업이 확정되면서 정작 수업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미리 지쳐버리기 일쑤다.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바닥에서 10여 년을 훌쩍 넘긴 강사 분들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다 보니 어느덧 나도 14년 째를 맞이하고 있다. 심지어는 한 학교에서 11년을 재계약하다 보니 예전의 나를 보듯 한 어린 강사 선생님은 그 노하우를 알려달라고 할 정도다. 이 정도 경력이라서 남들은 걱정 없겠다고, 그냥 학교 직원 아니냐고 맘 편한 소리를 하지만 모르는 소리다. 이곳은 초짜 강사든 경력 강사든 한없이 겸손하게, 초심을 잃을래야 잃을 수 없게 만드는 묘한 생태계의 특성을 보여주는 곳이다.



 그런데 그 강제된 초심이 일종의 직업병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해마다 여유로운 수업을 마음먹었다가도 채용공고를 주르륵 내리다 보면 이상하게도 지원할 수 있는 모든 학교를 다 염두에 두기 시작한다. 이건 채용이 안될 수도 있기 때문을 대비한다는 불안함과는 조금 결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다. 도장깨기 식으로 이런 나를 뽑지 않고서는 못 배길 거라는 근거 없는 인정 욕구를 채우려는 직업병 말이다. 게다가 새 수첩에 한껏 수업이 가능한 타임을 설정해 놓고 그 수업 스케줄을 빽빽이 채워 놓고서야 뿌듯해하는 한시적인 욕심도 누르기 힘든 직업병의 한 부분이다. 이 직업병이 발동을 하면 오후 1시-5시 수업 일정은 기본적으로 채우고 사이사이  9시-12시의 오전 수업을 찾아 나선다. 적당한 일정을 찾지 못한다고 실망하지 않는다. 학기가 시작할 때까지는 아직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요일, 일요일의 주말 특강 스케줄을 마련해 놓는다. 이렇게 차곡차곡 수업 스케줄을 마련해 둔다는 건 수업 의뢰가 들어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케이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뜻이다. 아니 백퍼 수락하게 된다. 이러다 정신을 차려보면 해마다 마음먹었던 여유로운 수업 시간표는 개나 줘 버리게 된다. 왜 그랬을까 반성하면서 또 여유로울 수 있는 다음 해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게 되는 사이클의 반복! 그래서 올해만큼은 그 직업병을 넘어서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러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등장한 것이다. 새롭게 지원해 볼 노둣돌 강사가 문제였다. 노둣돌 강사는 2월에나 공고가 나기 때문에 마음을 좀 놓고 있었다. 그런데!!! 교육청 노무 기준 사항에 강사들의 교육청 이중 근로계약 금지 조항이 있었던 것이다. 학교와 계약을 한 강사는 교육청 소속의 다문화교육센터의 노둣돌 강사는 이중 근로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둘 중에 하나만 하라는 소리! 또 정체성의 혼란이.... 나는 교육청 소속인가, 프리랜서 강사인가, 이도 저도 아닌 그냥 또 다른 특수고용직인가. 이런,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순간 꾹꾹 눌러오던 직업병이 봉인 해제되어 버렸다.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할 수 있을까? 내가 그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을까? 하.... 어차피 아들내미 1호도 학교 때문에 육지로 올라갈 것이고 아들내미 2호야 기숙사 생활로 주말에만 볼텐테, 너무 수업이 없으면 무료하지 않을까? 애들도 다 컸는데 이제 정말 수업에만 전력을 다할 수 있지 않을까? 코로나 때문에 작년처럼 취소되는 수업도 많을 수 있는데...... 생각은 점점 직업병을 공고하게 두둔하는 쪽으로 스멀스멀 새어 나온다. 아! 끝났다. 결국 나는 올해도 일단 두 개의 학교를 확정 지어 놓았다. 그러고도 칸칸이 마련해둔 수업 일정을 채우려고 틈만 나면(흡사 브런치 들락날락하듯) 교육청 채용공고를 보고 또 본다. 


 직업병이 도지는 바람에 오랜만에 끄적여본다. 마음이 많이 어지러웠음이다. 올해는 얼마나 수업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이게 늘 해왔던 틀에서 벗어나는 게 불안한 것인지, 아니면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것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여유 있는 한 해를 오매불망 기다린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뭔가로 바쁘고 열심일 때 가능한 오아시스 같은 달콤함이겠지. 넉넉한 마음을 즐기는 시간은 짧고 일상의 시간은 길게 다가오는구나. 습관처럼 교육청 사이트를 눌러대는 내 손을 어쩌지 못하겠다. 언제 또 훅하고 깨어날지 모르는 직업병을 잠시 내려놓고 오늘은 채용공고에서도 벗어나 본다. 그러면서도 머리로는 끝없이 수업 설계를...... 말릴 수 없는 직업병, 네가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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