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다. 여러 번의 크리스마스를 보내왔지만 이번처럼 맹숭맹숭한 건 또 처음인 것 같다. 아들내미 1호만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라도 좀 내겠다며 친구를 만나러 갔다. 5인 이상 집합 금지 때문에 친구 한 명만 만나고 온다고 걱정하지 말라는 변명 비슷한 한 마디를 남긴 채..... 남편은 조류독감 비상으로 출근을 했고 아들내미 2호와 나는 책도 읽다가 실없는 농담도 했다가 하며 멀뚱멀뚱 시간을 보낸다. 참 재미없는 크리스마스다. 작년까지 어떻게 보냈던가? 그래도 외출도 좀 하고 맛난 것도 먹고 했었는데 그게 참 까마득한 기억처럼 느껴진다.
아들내미들이 어릴 때는 참 여러 가지 준비를 했었다. 어린이집에서 미리미리 내주는 숙제, 아이들에게 줄 카드와 선물을 눈치 못 채게 준비하는 과정은 어느 집이나 다들 치르는 일이다. 거기에 우리 집에서는 좀 더 치밀한 과정이 있었다. 일단 2주 전쯤부터 거실 한 구석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워둔다. 캐럴이 흘러나오는 형형색색의 깜빡이 전구와 온갖 장식품, 미리미리 성탄절 분위기를 깔아놓아야 아이들의 기대치도 높아진다. 그러고 나서는 미니 우체통 준비. 우체통이라고 하지만 빈 과자 상자에 빨간 색종이를 붙이고 입구 하나 만들어주면 끝이다. 어린 아들내미들의 들쭉날쭉한 솜씨에도 충분히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아 이제 생각하니 진짜 행복하게 잘 지냈었구나!
요렇게 *아꼬왔던(귀여웠던의 제주어) 아들내미 1,2호
우체통을 만들고 나면 아들내미들이 바빠졌다. 산타할아버지한테 무슨 선물을 달라고 할지 딱 한 가지만 고르는데 꽤 많은 고민과 번민의 시간을 보낸다. 그 선물을 받을 정도로 자신이 괜찮은 아이였음을 증명할 수 있는 일화도 기억해 내야 했다. 그 모든 걸 편지에 써서 입구에 붙여 둔 빨간 우체통에 넣어두고 이날부터는 산타가 이 편지를 가져가는지 확인한다. 그 확인을 위해서 자기 전에 귤이라든가 사과라든가 하다못해 초콜릿 한 개라도 우체통 옆에다 놓아뒀었다. 편지를 가져갈 산타가 먹을 것들이다. 먹을 것들이 사라지면 편지들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이들은 당분간 아침이면 일어나자마자 우체통 앞으로 달려 나가 몇 날 며칠 기대와 실망의 순간을 맛보게 된다. 먹을 것들은 매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사이에 나는 아이들의 선물 목록을 점검한다. 너무 얼토당토 없는 것이면 은근슬쩍 산타의 입장을 대신 전하며 알맞은(?) 것으로 의도적인 수정에 들어갔다. 산타가 많은 아이들의 선물을 준비하려면 너무 비싼 것은 힘들지 않을까라든가 게임기는 산타가 선물로 주지 않을 걸 하는 걱정을 흘리기도 하면서......... 며칠째 편지가 그대로 있으면 두 아들내미는 머리를 모아 고민했다. 서로의 선물 목록을 점검해주고 적정한 수준(?)의 선물을 다시 한번 고르고 편지를 쓴다. 우체통 옆에는 귤이 하나씩 더 늘어나고 초콜릿도 쌓여갔다. 크리스마스를 한 3-4일 남겨둔 시점이 되면 그 많던 우체통 옆의 먹을거리들이 싹 사라지는 아침을 맞게 된다. 아이들은 확인하자마자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고 귤과 초콜릿들은 산타가 먹었는데 왜 엄마만 배가 부른 지 녀석들이 알 턱이 없다. 새벽에 이것들은 다 먹어치우느라 내 얼마나 힘들었던가! 물론 안 먹어도 됐지만 굳이 먹은 이유는 뭐 말을 하지 않아도 ㅎㅎㅎ
그렇게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아이들은 어린이집에서, 학교에 다닐 때는 트리 밑에서 자신들이 원하던 선물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성탄절을 보내게 된다. 물론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때도 있었다. 간혹 선물을 다 사 두었는데 갑자기 다른 선물이 생각났다면서 하루, 이틀 남겨두고 편지를 새로 써서 간절히 우체통에 넣는 아들을 볼 때라든가 준비한 선물이 아들이 생각한 것과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알아챌 때 세상 어디에도 없는 순발력이 필요했다. 아들내미들은 그렇게 산타의 존재를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도록 믿었더랬다. 아니 엄마만 그렇게 생각한 걸 거다. 사실 생각해 보면 산타의 존재를 믿어서 자신들이 손해 볼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내가 아이들의 순수함을 지켜준 게 아니라 아이들이 나의 기대를 지켜준 것일 수 있다. 아이들은 엄마의 기대감을 채워주고 선물도 받고 일석이조였을까?
갈 곳도 많았었는데....
내 어릴 적 크리스마스 중에도 유독 기억나는 한 지점이 있다. 어릴 땐 눈 많은 철원에서 지냈다. 아빠는 그리 살갑진 않았으나 성탄절이 다가오면 전나무를 잘라다가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어 주셨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반짝반짝 모루 몇 개가 작은 전나무를 휘감아도 돌기도 하고 색종이로 만든 장식품들과 무심한 듯 턱턱 뜯어 올린 솜으로 눈 맞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연출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해봤자 아빠 부대에서 나오는 종합과자 선물세트가 전부였지만 그 설레는 마음은 무엇보다 크고 좋았다. 그래도 딱 한 가지, 트리에 깜빡이 전구가 꼭 가지고 싶었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 아빠를 기다리다가 설핏 잠이 들었었다. 잠결에 뭔가 눈 앞에 번쩍번쩍하는 느낌에 눈을 떠 보니 내 목 주위로 화려하게 반짝이는 꼬마전구가 둘러져 있었다. 벌떡 일어난 나는 신이 나서 방방 뛰었고 기분 좋게 얼큰해진 얼굴의 아빠가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이제 보니 아이들을 바라볼 때 나의 웃음과 닮았다. 나의 크리스마스 중 단연 최고의 한 장면임은 말해 무엇할까!
작년 크리스마스 때 다 큰 아들내미들이 한 마디씩 했다. 다 먹고 난 귤껍질, 먹다 남은 사과 반쪽 이런 디테일에 자신들이 산타가 왔다 갔다고 생각했다며 끊임없이 추억을 되새겼다. 이런 것이었구나! 시간이 쌓여 되새길 수 있는 추억을 가진다는 게 내가 원했던 것이구나! 그제야 알게 됐다. 아들내미들이 자기 아이들을 키우게 되면 어떤 크리스마스의 추억을 만들어 줄까. 기대된다.
아 저 뿌듯한 표정들.. 보고 싶다!
톡마다 밴드마다 크리스마스 인사와 함께 아쉬움의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댄다. 아쉬운 대로 이런 사상 초유의 방콕 집콕 크리스마스도 나름 추억으로 자리하지 않을까. 내년 크리스마스 때는 올 크리스마스를 되새기며 참 특별한 크리스마스였다고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