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머무는바람 Jan 17. 2021

선배는 늘, 날 의심한다

하지만 항상 속는다.

내게는 오래된 선배 한 명이 있다. 과 선후배로 만나 벌써 30년을 이어온 우정이다. 물론 나는 우정이라 부르지만 선배는 아마 일방적인 돌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맏딸인 선배는 막내딸인 나를 보고 "하여간 이 막내들은 받는 데만 익숙해서 원, 존샘이 없어 존샘이." (*존샘:'자상하고 섬세한 마음 씀씀이'라는 뜻의 제주어)하며 혀를 끌끌 차기 바쁘다. 겉으로 보기엔 작달만하고 아담한 선배와 크고 한 덩치 하는 나의 조합이 좀 안 어울려 보일지도 모르나 나름 우리 둘의 케미는 괜찮다.

 같은 과에 같은 분과 활동, 과 학술분과도 같고 동아리마저 함께 하다 보니 겹치는 시공간이 많았다. 그렇다고 매번 같은 동선을 딱 붙어 다니거나 한 건 아니지만 심적으로 꽤 의지가 되는 그런 선배였다. 그래서 졸업 후에는 어쩌다 한 번 만나게 돼도 어색함보다는 어제 본 듯 자연스러워, 그 아무렇지도 않음이 또 놀랍기도 했다.

 심지어 아이들이 어린이집엘 다니게 되었을 때 선배의 권유로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동선이 겹치고 시도 때도 없이 만나고 전화하는 통에 남편은 "아예 선배랑 살아라 살아." 하며 잔소리가 늘었다. 그렇게 또다시 많은 부분에서 도움을 받고 함께 일을 진행하며 10여 년이 넘도록 같은 장르의 생활을 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하던 터라 반 백이 넘은 지금도 장난치는 건 30년 전 그대로다.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나오는 장난기, 내가 생각해도 유치하지만 그 장난기를 참기 힘들다. 특히 해마다 이쯤 채용 시즌이면 여지없이 장난기가 발동된다. 매번 다른 것도 아니고 나의 장난은 그 패턴이 늘 똑같다. 어떤 상황에서건 일단 선배를 놀려먹을 생각에 연기력도 어느새 수준급이 되었다.


먼저 톡을 보낸다.

-우잉 지금 ○○학교 가요ㅜㅜ.-

바로 뭔가 쎄한 느낌을 눈치챈 선배의 톡이 달린다.

-잉?-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시간차를 둔다. 그러면 기다리다 못한 선배의 궁금한 톡이 하얗게 질린 얼굴

마냥 말풍선에 담긴다.

-너 지금 어디?-

조금 더 시간을 끌다가 본격적으로 전화를 한다.

"때르르릉.....응..어떻게 된 거?"

"아니 언니, 오늘 **학교 발표였잖아?"

슬슬 밑밥을 깔기 시작한다. 너무 과하지 않게 감정 조절을 해야 한다.

"어 그래. 발표 났어? ○○학교는 왜 갔는데?"

"언니, 내가 열 받아서 전화했잖아. 그 **학교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나 지금 ○○학교 4시까지 접수 마감이라고 해서 이 눈길에 나와서 갔다 오는 중이야. 톡도 이제야 보구. 아우 내가 열 받아서......"

이쯤에서는 체념이 섞인, 그러면서도 분노의 감정이 조금 느껴지게끔 해야 한다. 너무 지나치거나 웃음기가 느껴지면 금세 눈치채게 된다. 진짜 채용에서 떨어진 것처럼 감정이입이 필요하다.

"잉? 진짜? 그럼 누가 된 건고?"

ㅎㅎ 드디어 선배가 미끼를 덥석 물어버렸다.

"그니까. 접수번호 4번이라고 하더니 지원자가 많았나 봐. 아니 12시에 문자가 와야 되는데 안 오더라고. 좀 늦나 싶었지. 혹시 하면서 전화해보니까 최종 합격 문자들은 다 보냈다는 거야. 에효 내가 창피해서 원."

"정말로? 어우야... 대박 사건이네. 아니 근데 네가 왜 안 됐을까? 학교가 너무했네."

이제부터는 선배가 위로해주려다가 오히려 더 분노하게 된다.

"아니 10년을 해왔는데 왜 채용이 안 되는 거? 뭔가 미리 내정자가 있었던 거 아닌가? 참 나 원, 야야 그 학교 버리고 다른 학교 지원서 내버려. 무슨 거기 말고 학교가 없냐 칫!"

한참을 흥분하던 선배가 문득 묻는다.

"......너 또 뻥이지?"

앗! 몇 번 골탕을 먹더니 이 언니, 눈치가 빨라졌다. 잘 수습해야 한다.

"언니두 참, 내가 지금 장난하게 생겼수? 하필이면 눈은 이렇게 내려서 체인 채우고 나왔다가 한쪽은 또 두 개나 풀려버리고...... **학교 문자 오면 이 날씨에 ○○ 학교는 지원서 내러 가지 말아야겠다 하고 있었는데 이게 뭐야. ○○ 학교 발표나 기다려야겠네. 이제 집에 가는 중이야."

더 의심하지 못하게 눈길에 체인, 두 개나 풀려버린 체인 때문에 고단한 감정, ○○학교의 결과를 내심 기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 등 소소하지만 깐깐한 장치들이 하나둘씩 들어차게 된다.

"그래 그래. 어휴 고생했네. 하필이면 이렇게 폭설인데. 다른 학교는 될 거야. 그리고 이제 너두 좀 여유 있게 수업할 때도 됐지 뭐. 한국어 쪽으로도 생각해 봐도 되고. 너무 걱정하지 말고....."

선배의 위로의 말이 이어진다. 이쯤 되면 심각한 선배와는 달리 나의 입꼬리는 웃음으로 한껏 올라간다. 그 웃음이 공기를 타고 느껴지는지 움찔, 전화기 너머 선배의 말이 잠시 틈을 만든다.

"너... 뻥이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이실직고할 시간이다.

"흐흐흐 언니, **학교 최종 합격 문자 왔어요. 큭큭큭."

"으이구 진짜. 내가 이상하다 했다. 넌 진짜 맨날 속여 먹구. 그러게 너가 안 될 리가 없지. 이상하다 했어. 잠깐, 그럼 눈길에 나선 거며 체인 풀어진 거며 다 일부러 꾸며낸 거야? 어이구 아주 그냥, 참 치밀하게도 짰네 원. 언니 놀려 먹으니까 재밌냐?"

어이없어 하면서도 다행이다 여기는 마음이 말속에 드러난다.  

"응~~ 언니가 이제 너무 금방 눈치채니까. 내가 어쩔 수 없이 더 이것저것 장치가 필요하네, 이거 원. 톡 시간 차 두는 것도 참기 힘들었어요. 홍홍홍."

"시간차까지.... 아주 소설을 쓰시네.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뭔데?"

"언니 속아 넘어가는 게 재밌잖아~~~"


이런 식이다. 늘 같은 패턴으로 속이는 나와 늘 의심하면서도 결국엔 또 속아 넘어가는 선배!

진짜 나는 왜 자꾸 이런 유치한 장난을 끊지 못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선배가 속아 넘어가는 것이 재밌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이런 '뻥'을 쳐 가면서 확인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완전한 내 편이 아닐까? 불운한 나의 가짜 상황에 같이 분노하고 걱정해 주는 온전한 내 편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마음 말이다. 그리고 가짜 상황임이 밝혀졌을 때조차 자신을 속였다는 괘씸한 마음보다는 그 상황이 진짜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마음을 가져줄 수 있는 사람이 나에게도 있다는 안도감. 10여 년이 넘는 시간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적응 안 되는 긴장감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주는 편안함. 이런 복합적인 확인과 확신이 필요할 때 나의 장난기는 선배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동되는 것 아닐까.


나에게는 이런 오래된 선배가 있다. 손이 많이 가기도 하고 화르륵 끓었다 식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나에게 막무가내로 안도감과 편안함을 안겨주는 온전한 내 편으로, 30년을 나의 정서 함양에 힘써 준 케미 좋은 선배! 오늘은 또다시 추울 거란다. 그래도 오늘은 선배랑 우리가 하루에 한 번은 꼭 먹어야 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직업병이 도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