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고도 쓸쓸한 팔순 할망의 의리

by 머무는바람

"어젯밤 꿈에 느이 아방이 보여라. 한 번 나오질 않더니 무슨 일인지 꿈에 다 보여라게."

이웃 삼춘(*제주에서는 이웃 어른들을 남녀 구분없이 삼춘이라고들 부른다.)들과 거한 김장을 한 후라 여기저기 후유증에 고생하는 엄마의 다리며 어깨를 위로해 줄 파스를 한가득 사들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씀하신다. 몇 달 전 아버지의 첫 제사를 지낸 터라 엄마는 아빠의 등장에 괜히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아빠가? 꿈에 안 나온다더니 좋았네. 아빠가 뭐랜 헙디가?(*뭐라고 했어요?)"
"아방이 영 마루에 앉아서 방이랑 부엌이랑 집을 살펴보더라. 얼굴은 편안해 보이고. 꿈이라도 다행이랜 생각햇주."
"아유, 아빠가 잘 있다고 알려주려고 그랬나 보네. 그러니까 엄마도 이제 마음 놓고 지냅서(*지내세요)."

여든을 넘기시면서 여느 어르신들처럼 이곳저곳 삐거덕 대며 불편한 곳이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꼼꼼히 살피고 관리하면서 잘 지내시던 아버지였기에 갑작스럽게 다가온 아버지의 부재는 우리보다 엄마에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그때부터 엄마는 걸레질을 하다가도, 냉장고를 정리하다가도, 안마기에 누웠다가도 텅 빈 눈길로 알 수 없는 시공을 하염없이 유영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잦아졌다. 이웃 삼춘들은 더 자주 집을 들락거리며 10원짜리 화투치기나 이런저런 군것질 거리로 엄마의 시간을 함께 해 주었다. 엄마는 엄마대로 또 그런 삼춘들을 고마워하며 조금씩 힘을 내갔다. 그러면서도 꿈에라도 한 번 아버지가 보였으면 좋겠는데 안 보인다고 꽤나 애석해 했었다. 그러던 차에 드디어 아버지가 등장했으니 마음이 쓰이면서도 반가웠던 모양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웃음을 빵 터뜨리고 말았다.

"아방이 영 둘러보다가 나보고 돈 아껴쓰라고 얘기해라게. 허 그거 참."
"네? 돈 아껴쓰라고?"
아니 엄마가 그렇게 기다리던 아버지가의 방문 이유가 돈 아껴쓰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니 어리둥절할 수 밖에.
"응.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나 보멍 돈 팡팡 쓰지 말고 아껴서 쓰라고. 내가 가만 생각해 보니까 이번에 김장하면서 삼춘들이영 먹을 돼지고기도 좀 많이 사고 배추도 좀 많이 하고 했는데 그거 때문에 온 모양이라."
너무 심각하게 당신의 행동을 되새기는 엄마의 모습에 죄송하지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그러게 엄마, 돈 좀 아껴 쓰지 그랬어요. 아빠 힘들게 꿈에까지 오게 하지 말고. 아이고 울 아빠 진짜 다녀가셨나 보네. 하하하."

아버지는 절약이 몸에 밴 분이었다. 30년 넘는 직업 군인 생활 끝에 연금으로 풍족하지는 않지만 크게 어렵지 않은 노후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도 꿰매고 붙이고 기워서 많은 물건들의 생명력을 연장시키고 그 내공을 키워나가는 아버지를 주변에서는 그렇게 지독할 게 뭐냐고 끌끌 혀를 차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아버지이다 보니 엄마의 살림이 간단할 리 없었다. 딱 맞춤한 생활비로 그야말로 한 치의 틈도 없는 생활의 달인이라고 해도 좋았다.

"혹시 내가 먼저 가면 연금이 이녁(*당신) 앞으로 나오난 그걸로 생활하기 부족하지 않을 거라. 그 연금이면 충분하주. 애들한테 기대지 말고."
아버지가 한 번씩 이렇게 말하면
"에구에구. 나 무슨 복이 있어서 팡팡 쓸거라? 이상한 소리 하지 맙서. 나보다 아방이 더 오래 살거주게."
엄마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잔소리로 일축하곤 했다.

아버지의 연금이 엄마 통장에 처음 들어온 날, 엄마는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며칠이 지나도 꺼내 쓰질 않았다.
"성님, 이제 성님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삽서. 꼬부랑 할망이 이 연금이면 하고 싶은 거 다 허주."
짓궂은 이웃 삼춘의 말에도 엄마의 통장에서 출금이 이루어지는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조금 자유로워졌다면 손자들 용돈을 당신 마음껏 주게 됐다는 점 정도라고 할까? 쓸 데 있으면 신경 쓰지 말고 쓰시라고 해도 여전히 통장의 액수만 늘어갈 뿐이었다.

그러다가 이번 김장에 좀 넉넉히 꺼내 쓴 모양이다. 아랫집에 대문도 좀 고쳐주어야 해서 그 비용도 좀 나갔단다. 엄마 입장에선 확 늘어난 지출이 내내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꿈 속에 다녀간 아버지의 돈 아껴 쓰라는 잔소리는 혹시 엄마가 만들어낸 마음의 소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도 든다.

큰 웃음으로 지나치긴 했어도 어쩌면 이게 아버지에 대한 엄마의 의리, 그것도 너무나 귀여운 팔순 할망의 의리일 수 있겠구나. 평생을 함께 일궈온 아버지의 삶의 태도를 기억하고 지켜주려는, 그래서 아버지의 삶이 그대로 없어지는 것 같아 아무렇지도 않게 함부로 써서 사라져 버리게 할 수 없다는 그 애석한 마음.

새해 나고서도 벌써 석 달이 지나간다. 설도 차리고 *괸당(친척)들 *부주도 터지고 쓸 데가 많았을 텐데 엄마의 통장은 여전히 꼼짝않고 의리의 마음만을 끌어안고 있다. 김장 이후로 엄마의 꿈에는 더 이상 아버지의 방문은 없다고 한다. 새 봄에는 날씨 풀리듯 엄마의 통장도 풀려 아버지의 방문이 또 한 번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괸당들 부주도 터지고 : 제주 시골에서는 아직도 친척들 경조사 부조금을 하는데 겹부조를 하는 경우가 있어서 부조금이 많이 들어갈 때가 있다. 그때 '부주가 터진다'는 표현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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