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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滅), 여기 우리 살아 있다

by 머무는바람

140년 만이야. 오랜만이군.

꼭꼭 숨은 나를 잘도 찾아 냈더군. 너희들의 집요함이란.

뒷통수를 얻어맞아 시퍼런 멍이 든 나의 사촌이 너희들에게 살찐 닭둘기라고 농락당할 때

검은 뒷통수를 숨기며 나는 사라지길 소원했었어. 조용히, 서서히 잊혀지길 말이야.

나의 의도된 멸, 사라짐은 성공적이었지.

140년 간 너희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해왔는지 몰라.

나의 섬 속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고 울음 소리 한 번 편하게 내지르지 못했어.

그렇게 검은깃 꿩비둘기라는 이름이 너희들의 머릿속에서 제발 멸하기를,

140년을 기도해왔어.

너희들은 결국 나를 '멸종'이라 선언했지.

소리없는 환호성이 나의 섬을 온통 휘감았던 그때를 기억해.


그래, 모든 게 다 나의 잘못이다. 인정해야겠지. 내가 방심했어.

이젠 너희들과는 다 끝났다고 마음을 잠시 놓았던 거,

그 카메라를 너무 안일하게 들여다 보았던 거,

다 내 잘못이라구.

그만해. 이젠 제발 그만하라구. 나도 지쳤다.

그래 이제 어쩔 셈인가.

나를 잡아 벽에 걸어둔 채 마지막이라고 전시라도 할텐가.

흠, 이제야말로 내가 원하던 멸의 실현인 건가.

생각해왔던 것보다 훨씬 마음이 무겁군.

이런 마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한 마디만 해두지. 난 이렇게 멸의 길을 가지만,

130년, 70년의 사라짐의 시간을 들켜버린 친구들도 있지만,

글쎄, 다른 애들도 그럴까.


잘 기억해 둬.

멸한 가운데 조용히 살아 있는 그들이 있다는 걸.

멸은 너희들만의 착각일 수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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