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오늘 암구호 말해봐”
“이병! 제갈공감! 오늘 암구호는 등대! 손님! 이상입니다.!”
야간 경계근무를 나가기 전, 사수가 암구호를 숙지했는지 물어본다. 오늘 근무 시간은 03:00부터 4:30까지. 가장 깊이 잠든 시간에 억지로 몸을 깨워 나가아 하고 근무가 끝나도 다시 잠들기엔 애매한 시간이다. 사수의 기분도 좋을 리 없다. 입대한 지 두 달, 자대 배치를 받은 지는 이제 한 달 남짓. 적응하느라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쳤지만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 이등병인 나는 살아남기 위해 눈치 더듬이를 바짝 세운 채 경계 근무지로 향했다. 그나마 말수가 적은 사수와 함께 근무를 나갔을 때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시간이 유일한 휴식이다. 손목시계가 빛날 때마다 아버지를 닮은 미래의 내가 찾아왔는데 최근엔 만나지 못했다. 그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에 오늘이라도 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멈춰! 움직이면 쏜다! 등대!
......
"등대!!"
......
"손님."
달빛에 비쳐 희미하게 비친 얼굴은 미래에서 온 상담 선생님이었다.
청년 : (반가운 얼굴로) 오랜만에 찾아오셨네요.
상담샘 : 반갑게 맞아줘서 고마워. 내가 많이 보고 싶었구나? 유류창고 앞에서 야간근무를 하고 있는 걸 보니 지금은 군인 시절이네.
청년 : 맞아요. 이제 두 달 됐어요. 그동안 군대 생활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이등병의 삶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요. 하루 종일 긴장의 연속이에요.
상담샘 : 맞아, 맞아. 아직도 가끔 군대에 다시 꾸는 악몽을 꿔. 끔찍하지. 대학교를 휴학하고 군대에 입대하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지? 오늘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인데?
청년 : 역시 눈치가 빠르세요. 지금 가장 큰 고민은 아버지의 첫 기일에 휴가를 나가기 힘든 상황이라는 점이에요. 보통 입대한 지 100일 전후로 첫 휴가를 나가잖아요. 그런데 아버지의 첫 기일은 70일 즈음이에요. 그래서 행정보급관님이 이등병 면담을 할 때 용기를 내서 조금 일찍 휴가를 나갈 수 있는지 여쭤봤어요. 하지만 차가운 인상의 행정보급관님은 단칼에 안된다고 하셨어요. 형평성에 맞지 않다는 이유를 대셨죠. 속으로 너무 안타깝고 답답했어요.
상담샘 : 그래. 그 행정보급관은 원리원칙주의자였지. 아버지의 첫 기일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아들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슬펐겠구나.
청년 : 맞아요. 이미 미안한 마음이 큰데 죄책감이 더 커졌어요. 그래서... 한번 더 용기를 내서 대장님께 직접 찾아가서 말씀드려 볼까 고민 중이에요.
상담샘 : 와... 정말 놀랍다. 대장실은 근처에 가기만 해도 위압적인 공간인데 거기까지 찾아가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연약한 줄 알았는데 속에 큰 용기가 있었네. 대장님은 인상이 선하시고 따뜻한 선생님처럼 병사들을 바라보셨지. 용기를 내서 찾아가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청년 : 응원해 주셔서 감사해요. 찾아가서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상담샘 : 가능하면 점심 먹고 난 뒤, 1시에서 2시에 찾아가는 게 좋아. 재판 판결도 그 시간에 더 좋은 판결이 내려진다고 하더라고. 신기하지? 배가 부르면 기분이 좋아진대. 마음도 조금 느슨해지거든. 부탁이 가장 잘 통하는 시간대야.
청년 : 완전 꿀팁이네요. 그 시간을 노려봐야겠어요.
상담샘 : 그래. 또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
청년 : 네. 훈련소 때 겪은 이야기예요. 내무실에서 집단으로 심리검사를 했어요. 문제를 읽고 O, X로 답하는 형식이었죠. 며칠 뒤, 훈련병 번호 열댓 명이 호명됐어요. 그 속엔 제 번호도 있었죠. 영문을 모른 체 버스를 타고 부대를 나왔고 도착한 곳은 병원이었어요. 3~4명의 훈련병씩 의사를 만났어요. 의사는 우리를 훑어보더니 한 명을 지목해서 남기고 나머지는 나가라고 했어요. 나중에 알았어요. 그분이 정신과 의사였다는 걸요. 지목된 한 명은 의가사 제대를 했고요.
상담샘 : 많이 놀랬겠구나.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을 거야.
청년 : 속으로 진짜 많이 놀랬어요. '내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볼까 봐 불안했어요. 다시 내무실로 들어왔을 때, 아무 말 없이 쳐다보는 시선들이 따가웠어요. 내가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 같았어요.
상담샘 : 수치심을 느꼈을 거야. 마치 고장 난 기계로 분류된 기분이었겠지. 네가 했던 검사는 사람을 판단하는 시험이 아니라 지금 마음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보는 검사야. 네가 이상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많이 지쳤다는 걸 알려주는 신호였을 뿐이지. 아버지를 잃은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군대라는 극한의 환경에 던져졌잖아. 우울과 불안 수치가 높게 나왔을 가능성이 커. 하지만 의사와의 면담 후 문제가 없다고 판단됐다는 건 오히려 네가 괜찮다는 뜻이야.
청년 : 결론은 군대 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결과였는데 제가 마음이 많이 약해져 있어 더 안 좋게 생각한 것 같아요.
상담샘 : 맞아. 이야기를 듣다 보니 우리 멘탈이 생각보다 훨씬 강한 것 같아.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도 묵묵히 자기 삶을 이어 가고 있잖아. 정말 대견해.
청년 :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있어요. 제가 여자친구가 있잖아요. 군대에 가면서 떨어져 있는데 많이 보고 싶어요. 과연 여자친구가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고 기다려줄까요? 주변에선 기대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미래에서 오셨으니 알고 계시겠네요?
상담샘 : 그 마음 너무 잘 알지. 내가 정답을 알고 있는 셈이네. 음… 하지만 이야기해 줄 순 없을 것 같아. 다만 지금 이 순간, 네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우리는 생각보다 강하니까.
청년 : 지금은 군대 안이라 제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데요.
상담샘 : 하하. 그렇지. 그래도 일과 후에 통화하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여자친구를 믿고 서로를 믿는 게 답이야. 아마 정답을 알고 이미 실천하고 있었겠지만 그래도 힘들지? 혼자 견딘다고 생각하지 말고 함께 견딘다고 생각해 봐. 그럼 조금 덜 힘들 거야.
사수가 잠에서 깨어나는 소리에 나는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청년이 궁금해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이후의 일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다음날 청년은 용기를 내어 대장실에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대장님은 자상한 얼굴로 이등병을 넓고 편안한 소파에 앉혔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이등병은 작은 목소리로 수백 번 연습한 말을 꺼냈다. 아버지의 첫 기일에 아들로서 꼭 참석하고 싶다는 말을 꺼낼 땐 목소리가 눈물에 잠겨 떨렸다. 대장님은 떨리는 이등병의 어깨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다행히도 청년은 군대에 입대한 지 70일 만에 100일 휴가를 나와 작은 절에서 아버지의 첫 기일 제사를 지냈다. 아버지의 사진 아래에 향을 피우고 엎드려 절을 한 청년은 한참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대장님의 따뜻한 명령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은은하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