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기 : 미워해도 괜찮아

오늘은 그냥 돌아가 주세요

by 제갈공감

학교에는 마음이 아픈 학생들이 많다. 친구와 다투고 어떻게 화해할지 고민하는 아이, 집에서 부모님이 사이가 좋지 않아 힘들어하는 아이 등 고민의 주제도 다양하다. 상담실에서 나누는 이야기의 결이 제각각이기에 몸을 기울여 이야기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학생들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혼자서는 견디기 힘들었던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최근에는 자신도 영문을 모르는 우울감을 밤마다 견디는 소녀와 상담을 했다. 마음을 좀 더 세심하게 이해하고 싶어 여중생이 쓴 소설 <시한부>*를 샀다. 스스로 생의 마지막 날을 정한 여중생과 그 뒤에 남겨진 친구의 이야기다.

할머니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나가기 전에 사랑한다고 한 번 안아볼 걸 그랬나.

이 부분에서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갑작스러운 감정이었다. 남겨진 사람의 시간을 통째로 뒤틀어 놓고 떠나버리는 선택이 이기적이라고 느껴진 걸까. 책을 덮고 고개를 들자 숨이 한 번에 빠져나갔다. 그때, 책상만 밝히던 주황색 미등이 방 전체를 밝히며 나를 덮쳤다. 지끈한 두통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 곳은 대학교 시절의 내가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던 건물의 복도였다. 야간 강의가 끝나면 강의실 문단속을 하는 일이었다. 멀리서 열쇠뭉치가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지 않도록 크게 울리는 발소리를 의식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청년은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우리는 함께 강의실 문을 잠그고 사무실로 돌아와 원탁에 마주 앉았다.


청년 : 마실 것 좀 드릴까요?

상담샘 : 좋지. 고마워. 군생활 하느라 고생 많았지?

청년 : 아니에요. 고맙게도 여자친구가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고 기다려 주었어요. 제대하는 날은 정말 하늘이 온통 내 것인 것처럼 기뻤는데 며칠 지나니 다시 정신 차리고 열심히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상담샘 : 2년이라는 시간은 짧은 기간이 아닌데 별 탈 없이 제대한 건 대단한 거야. 국방의 의무를 다한 것이기도 하고. 여기 원탁에 상담 전공 서적이 많이 쌓여 있는 걸 보니 이미 열심히 공부하고 있구나.

청년 :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고민이에요. 대학원은 돈이 많이 들어서 포기했고, 졸업 후 바로 취업하고 싶어요. 전문상담교사 자격증이 나오긴 하는데 임용시험이 쉽지 않아서요. 일반 공무원이나 학습지 일도 알아봤지만 그것도 만만치 않네요.

상담샘 : 빨리 취업하고 싶은데 현실은 녹록지 않아서 많이 답답하겠네. 그래도 상담교사가 되고 싶은 꿈이 제일 큰 것 같은데?

청년 : 맞아요. 일단 안정적이잖아요. 아빠는 사업을 하느라 항상 불안정했어요. 그래서 엄마가 고생을 많이 하셨고요. 물론 상담교사가 내 적성에 맞는지도 고민해 봤어요. 상담은 공감능력이 좋아야 하는데 제가 잘할 수 있을지 걱정돼요.

상담샘 : 공감은 꼭 타고나는 건 아니야. 경험하면서 배우는 부분도 크지. 공감능력도 중요하지만 심리학에 대한 전문성도 필요해. 지금 열심히 공부하는 걸 보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리학에 대한 지식이 이미 많이 쌓여 있을 거야.

청년 : 안 그래도 공부하다 보니 헷갈리는 부분이 있어요.

상담샘 : 어떤 거지?

청년 : 상실 이후의 심리 단계요. 여기 전공서에 나와 있어요.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단계를 거치는데 사람마다 순서도 다르고 어떤 단계는 건너뛰기도 한다고 하잖아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는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분노 단계가 없었던 것 같아요.

상담샘 : 아버지가 밉지 않니?

청년 : 네. 화가 난 적은 없어요.

상담샘 : 그러고 보니 아버지에 대해서 나쁘게 이야기한 적이 없구나.

청년 : 아버지는 힘들었을 거예요. 그걸 몰랐던 게 많이 미안해요.

상담샘 : 그래. 네 말처럼 미움이 없을 수도 있지. 하지만 미움이 다른 곳으로 향했을 가능성은 없을까? 아버지를 미워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으니 스스로에게로...

청년 : 그건 너무 이론에 끼워 맞춘 것 아닐까요? 물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많지는 않지만 설사 스스로를 미워한다 해도 그게 아버지를 미워하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어요. 제가 이해하지 않으면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을 것 같아서요. 혼자 쓸쓸해하실 것 같아요.

상담샘 : 그래. 그 마음이 너를 지금까지 버티게 해 준 마음일 거야.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감정을 자신도 모르게 밀어 넣은 것이라고 설명했어. 아버지에 대한 분노도 차마 부모를 미워할 수 없기에 자신도 모르게...

청년 : 오늘은 그만 돌아가 주세요! 밤늦게까지 일했고 미래에 대한 고민도 많은데 내 마음속 이야기까지 하려니 머리가 아파요. 상담샘 생각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저는 아닌 것 같아요.

상담샘 : 나도 모르게 내 생각을 강요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네가 느끼지 못하는 무의식이 내 눈에는 보여.

청년 : 그렇게 저를 평가하듯 말하지 마세요! 제 마음은 제가 더 잘 안다구요! 그냥 열심히 잘하고 있다고 힘내라고 응원해 줄 수도 있잖아요. 화가 날 수도 있고 안 날 수도 있는 거죠. 너무 복잡하게 생각 안 할래요.

상담샘 : ... 그래. 내가 너무 섣불렀네. 밤늦은 시간이라 피곤할 텐데 집에 가서 푹 쉬렴.


눈을 뜨자 다시 상담실이었다. 미등은 같은 자리에 있었고 책은 여전히 멈췄던 문장을 펼친 채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나가기 전에 사랑한다고 한 번 안아볼 걸 그랬나


문장을 다시 읽었다. 내가 화가 난 이유는 소설 속 소녀가 미워서도, 할머니를 남겨두고 떠난 선택이 못마땅해서도 아니었다. 차마 아버지를 미워하지 못한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떠나기 전 하고싶은 말을 다 했으면서 정작 아들은 평생 죄책감에 힘들게 했다는 사실에 대한 원망이었다. 아버지를 이해하려고만 했던 시간,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고 믿었던 시간, 그 대신에 스스로를 미워하며 버텨온 시간들을 그 문장이 들춰냈다. 그때는 몰랐다. 분노가 없다고 생각했던 시절은 사실 분노를 느끼지 않으려 애쓴 시간이었고 미움이 없다고 믿었던 시절은 미움을 애써 모른체 한 선택이었다. 청년은 아직 모를 것이다. 미움도 내게 꼭 필요한 감정이라는 것을. 과거의 나에게로 돌아가서 깨닫길 바랐지만 청년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직 청년에게는 아버지를 미워하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었으리라. 차라리 미래의 나에게 더 속 시원하게 화를 내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방식으로 묵묵히 미래를 준비하는 나의 젊은 날을 애틋하게 바라 볼뿐이다.


*시한부 (백은별)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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