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기 : 저 바다에 누워

다채로운 애도의 빛깔

by 제갈공감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대학생들로 가득한 캠퍼스는 애써 꾸미지 않은 생기가 감돌았다. 빨간 카디건에 청치마를 입은 여대생이 두터운 전공책을 품에 안고 친구들과 웃으며 지나가고, 강의에 늦은 남학생이 푸른 백팩을 멘 채 자전거의 페달을 힘차게 밟는다.

그렇다. 나는 다시 과거의 청년 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청년 앞에 정확하게 도착하지 못했다. 거리를 둘러봐도 온통 낯선 얼굴뿐이었다. 지난번의 대화가 기분 나빠 다시는 나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나를 피해 숨은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저 멀리서 화사한 캠퍼스와는 어울리지 않은 칙칙한 도복을 입은 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왼손에 죽도를 든 사람들이 맨발로 대운동장을 나와 학과 건물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키득거리며 그들을 쳐다봤다. 위풍당당한(본인들만 그렇게 생각할 것 같다.;;) 대열의 선두에 서서 긴장한 얼굴로 걷고 있는 과거의 내가 보인다. 하... 저 땐 왜 굳이 맨발로 걸었을까? 차마 다가갈 용기가 안 난다. 과거의 흑역사를 직관하는 기분이 이렇게 매운맛일지 몰랐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검도동아리 회장을 맡고 싶지 않았지만 마땅한 사람이 없어 등 떠밀 듯 맡았던 기억이 난다. 현재의 나는 그들의 뒤를 미행하듯 쫓았다. 청년이 옷을 갈아입고 나와 혼자가 될 때를 기다렸다. 운동을 하고 나서 목이 마른 지 청년을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시원한 콜라를 뽑아 마셨다. 오랜만에 자판기 안에서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청년에게 다가갔다.

상담샘 : (어색하게 웃으며) 안녕. 막 운동하고 오는 길인가 보네?

청년 : 네... 잘 지내셨어요? 음료수 하나 드실래요?

상담샘 : 그래, 고마워. 나도 콜라 마실게.

우리는 푸른 잔디밭에 나란히 앉았다.

상담샘 : 아까 보니깐 검도 동아리 회장을 맡은 것 같더라.

청년 : 맞아요. 반장도 한 번 안 해봤는데 회장이라니요. 어젯밤엔 잠도 잘 못 잤어요. 하지만 생각보다 후배들이 잘 따라줘서 다행이에요.

상담샘 : 오늘은 잘 지나간 것 같네. 지난번엔 내가 너무 내 생각만 몰아붙였지?

청년 : 아뇨. 저도 뭐... 죄송해요. 샘 이야기가 맞을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목소리를 높였는지 모르겠어요. 저도 그날 밤 잠자리에서 후회하면서 이불킥을 했어요. 자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아빠에 대해서 좋은 점만 생각하는 것 같긴 했어요. 아빠가 싫을 때도 있었는데 말이죠.

상담샘 : 괜찮아. 말이 좀 이상하지만 네가 결국 나잖아? 나도 이불킥 전문가야. 어쨌든 아빠에 대해 좋게만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구나. 아마 누구나 그럴 거야.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못해준 것들만 떠오르고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에 좋은 점만 기억되는 것 같아. 미워하는 사람이 떠나서 후련한 사람들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마음 한편이 찝찝할 거야.

청년 : 사람의 마음은 참 복잡한 것 같아요. 심리학을 배우면 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요?

상담샘 : 분명 도움이 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건 여전히 어렵지만 숨어있는 내 마음을 발견하는 나침반 역할을 해. 예를 들면 아빠가 돌아가신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아빠를 한 가지 색으로만 기억했다는 것을 깨달았어.

청년 : 한 가지 색이요?

상담샘 : 우리 편안하게 아빠에 대한 추억들을 한 가지씩 이야기해 볼까? 먼저 시작해 봐.

청년 : (약간 뜸 들인 후) 아빠가 술을 마시고 들어와 잔소리를 하는 게 싫었어요. 왜 그렇게 남자답지 못하고 목소리가 작냐, 아빠는 학교 다닐 때 제일 싸움 잘했어라는 레퍼토리였죠. 그때도 아빠의 말이 믿기지 않았어요. 아빠도 어릴 때 약했으니 나약한 내 모습이 싫었고 좀 더 남자답길 바랐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자주 자는 척했어요.

상담샘 : 맞아. 코 고는 연기까지 했지.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큰 진돗개가 내 방에 떡 하니 서 있던 기억이 나. 뭐지? 이 개는? 하면서 뭐라도 주고 싶어 냉장고 안에 있던 우유를 꺼내서 접시에 부어주었지. 나중에 알고 봤더니 아빠가 술을 마시고 친구의 개를 우리 집에 데리고 온 거더라고. 개한테 소젖을 먹여서 배탈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미안했지.

청년 : 맞아요. 차라리 물을 줄걸 이라고 후회했죠. 그리고 아빠는 기타를 잘 치고 음감이 좋았어요. 내가 노래를 부르면 처음 듣는 노래도 척척 기타 코드를 찾아 연주해 주셨죠.

상담샘 : 반전은 아빠가 노래는 잘 못 부른다는 거였지. 차를 타고 집에 거의 도착할 때즘이면 어린 나를 운전대 앞에 앉히고 핸들로 조종할 수 있게 해 줬지. 그게 참 재미있었어.

청년 : 그리고 내가 조수석에 탈 때면 진짜 운전 조수가 되어서, 아빠가 3단! 하면 3단으로 기어를 움직였죠. 나중에 이모부한테 내가 기어를 조정한다고 했더니 정색하며 위험하다고 했어요.

상담샘 : 아빠는 참 장난기가 많았어. 가족들과 바다에 자주 놀러 간 기억이 나. 상담을 하다 보면 눈을 감고 편안했던 기억 속으로 돌아가는 활동이 있어. 그때마다 아빠랑 같이 두 사람이 누울 수 있는 큰 튜브를 타고 먼바다에 나간 기억이 나. 손깍지 베개를 하고 잔잔한 바다 위에 누워 살랑살랑 흔들리던 기억이 참 편안해.

청년 : 저도 그때를 떠올리면 평온해요. 근데 이상하죠? 사실 그 당시에는 엄청 무서웠거든요. 나는 수영도 할 줄 모르는데 너무 먼바다까지 나와서 못 돌아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아빠만 태평했죠. 빨리 돌아가자고 졸랐어요.

상담샘 : 당시에는 불안했는데 지금 그 장면을 떠올리면 왜 그렇게 평온할까?

청년과 나는 푸른 잔디 위에 발을 뻗고 뒤로 반쯤 기댄 채 하늘을 보았다. 적당히 부는 바람을 따라 잔디의 끝에 맺힌 햇빛이 바다의 윤슬처럼 반짝였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버지를 알게 된 사람들은 그를 하나의 사건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냥 아빠였다. 단색이 아닌 다채로운 빛깔을 가졌던 평범한 한 사람. 우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동안, 저 바다 위에 함께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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