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색된 시절
저녁을 먹은 후 반듯하게 조성된 산책길을 걷다가 멀리 솟아 있는 아파트를 바라본다. 듬성듬성 켜져 있는 창가를 바라보니 나도 단란한 가정을 꾸려 따뜻한 창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새삼 감사하다. 젊은 시절에 저 아파트를 짓는 공사 현장에서 일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파트를 지날 때마다 아내에게 내가 지었다며 이야기를 꺼내면 또 그 이야기냐며 핀잔을 주던 대화가 떠오른다. 벤치에 앉아 상념에 잠기자 아파트 창문의 빛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간다.
도착한 곳은 20여 년 전 7층 아파트 공사 현장의 점심시간. 오전에 고된 일을 하고 잠시 쉬는 소년이 보인다. 회색빛 콘크리트로 가득한 곳에서 침대 크기만 한 스티로폼 위에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서로의 목소리가 마음의 진동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상담샘 : 두 번째 만남이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지금은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 끝나고 아파트 현장에서 일하던 때인 것 같아. 그동안 잘 지냈어?
소년 : 네. 그럭저럭 지냈어요. 작년 여름 방학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정신 차리고 열심히 공부했어요. 1학기는 팽팽 놀아서 학점이 낮았는데 2학기에는 과에서 상위권을 차지할 정도로 학점이 높아졌어요.
상담샘 : 마음이 많이 힘들었을 텐데 정말 대단해. 큰 충격 이후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거든. 오히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더 막살면서 자신의 삶을 헤치는 경우도 있고.
소년 : 아... 아니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아빠가 그렇게 힘든 줄도 모르고 1학기 때 나 혼자 행복하게 지낸 게 미안해요.
상담샘 : 그래. 그건 아빠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겠지. 가족이 떠나고 나면 죄책감이 불어나고 탐정처럼 잘못한 것만 찾아내지. 근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소년 : 그럴만한 이유요? 궁금해요.
상담샘 : 심리학자 에드워드 던칸은 자살이나 살인 등 폭력적인 사별을 경험한 유가족을 돕는 애도와 외상모델을 만들었어. 그 모델에 따르면 유가족은 비슷한 심리적 단계를 밟게 돼. 1단계는 충격과 부인 단계야. 감정이 마비되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지. 저번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이 꿈같이 느껴진다고 했지? 그때가 1단계였어. 2단계는 분노야. 어떻게 우리를 두고 이럴 수 있냐고 아버지를 탓하거나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과 세상에 화가 날 수 있어. 분노는 슬픔을 견디기 힘들어 자신의 마음을 지키려고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 3단계는 죄책감 단계야. 가장 고통스러운 단계지. 아버지가 힘든 줄도 모르고 행복하게 지낸 것을 미안해하거나 성적이 낮은 것을 불효로 느끼는 것은 지금 이 단계에 있기 때문이야.
소년 : 그렇군요. 누구나 이런 과정을 겪고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아요.
상담샘 : 마음이 편해졌다니 다행이구나. 그렇다고 억지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할 필요는 없어. 그럴수록 오히려 죄책감이 더 커질 수 있거든. 심리학에서는 그걸 '흰 곰 효과'라고 불러. '흰 곰을 생각하지 마세요'라고 하면 머릿속에 온통 흰 곰만 떠오르는 것처럼 죄책감을 억누르려고 하면 우리 뇌는 그 감정에 더 강하게 집착하게 돼.
소년 :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담샘 : 3가지 방법이 있어. 첫째는 수용하기야. '아, 내가 아버지를 많이 사랑해서 지금 미안한 마음이 드는구나'라고 마음을 그대로 인정해 주는 거지. 감정은 알아봐 줄 때 힘이 빠지거든. 둘째는 현재로 시선 돌리기야. 지금 눈에 보이는 색깔 5가지를 찾고 들리는 소리 3가지를 찾아봐. 그럼 현재에 집중할 수 있어. 마지막으로 죄책감을 가지는 시간을 정해두는 거야. 가장 편안 시간 10~20분을 정해두고 마음껏 죄책감을 느끼는 거지. 이 3가지 방법을 사용하면 죄책감에 이용당하지 않고 오히려 감정의 주인이 되어 스스로를 잘 다스리는 기분이 들 거야.
소년 : 잘 적어둘게요. 들어보니 정말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상담샘 : 그래. 차근차근해 보자. 죄책감 때문에 많이 힘들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아가는 데 원동력이 되기도 할 것 같아.
소년 : 네. 맞아요. 올해부터 전문상담교사가 될 수 있는 교직 이수 과정이 생겼는데 2학기 때 열심히 한 덕분에 저도 교직이수과정을 밟을 수 있게 되었어요.
상담샘 : 와! 짝짝짝. 장하다 장해. 열심히 노력한 보람이 있네.
소년 : 감사해요. 근데 아직 상담교사를 많이 뽑지 않아 과연 임용에 합격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그리고 성격이 소심해서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적성에 맞을지 걱정도 되고요. 그래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2학년 때부터 교직이수과정을 밟아볼 생각이에요.
상담샘 : 맞아. 그렇게 생각하면 돼. 교직이수과정을 밟아 상담교사가 되는 것도 좋고 아니면 다른 일을 찾아 직업을 선택할 수도 있지. 세상은 계속 변하니깐 선택권을 넓혀 놓았다고 생각하면 돼.
소년 : 사실 심리학과에 들어와서 선배들로부터 암울한 이야기만 들었어요. 심리학과 나오면 백수 된다느니, 대학원에 무조건 가야 그나마 직장을 구한다느니, 10년 전부터 심리학과의 전망이 밝아진다고 했는데 아직도 켜지지 않는 등불이라는 둥 그런 소리를 들으면 미래가 어둡고 힘이 쭉 빠져요. 돈도 없는데 대학교를 때려치우고 일반공무원 준비에 올인할까 생각도 들어요. 근데 그러려면 또 목돈이 필요하고 확신도 없어 포기했어요.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져서 닥치는 대로 일했어요. 공강시간에는 근로장학생으로 도서관에서 일하고, 주말 저녁에는 술집에서 서빙을 했고요. 일하면서도 공부를 놓지 않은 덕분에 장학금도 받았어요. 말하고 보니 뿌듯하네요.
상담샘 : 정말 장하고 대단해. 내 앞에선 실컷 뿌듯해하고 마음껏 자랑해. 나는 알아. 혼자 많이 애썼다는 걸. 눈치가 보여서 하지 못했던 말들을 다 들어주고 싶어.
소년 : 감사합니다. 응원받는 기분이에요. 사실... 잘 사는 친구들은 방학 때 어학연수를 가거나 해외여행을 가던데... 괜히 화가 나고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요. 어릴 적 미술학원 다닐 때가 생각났어요. 제 크레파스는 24색이었는데 36색, 48색의 크레파스를 가지고 있던 친구들이 부러웠죠. 남들은 다 행복한 것 같아 질투가 나요. 나도 색이 많은 크레파스가 있다면 더 다양한 경험을 하고 더 예쁘게 세상을 칠할 텐데... 지금 제가 가진 건 연필 한 자루예요. 연필로 아무리 멋있게 스케치를 해도 뭔가 허전하고 슬픔 느낌이 들어요. 그래도 열심히 한번 그려보려고요.
상담샘 :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시리구나. 화려하게 채색된 그림도 예쁘지. 하지만 지금 수백 번의 연필 선을 겹쳐 그리는 스케치가 인생을 받쳐줄 강력한 뼈대가 될 거야. 지금 여긴, 춥고 회색만 보이는 아파트 건설 현장이지만 이곳도 미래엔 누군가의 가정이 되겠지. 식탁에 둘러앉아 과일을 나누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따뜻한 공간이 될 거야. 우리의 미래도 밝고 따뜻할 거야.
소년 : 네. 응원 감사해요.
상담샘 : 지금 너무 잘하고 있어. 아파트 현장의 공사일이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나. 일을 마치고 같이 일하는 분들이랑 노래방을 갔는데 그 시끄러운 와중에서도 쿨쿨 잠을 잔 기억이 나네.
소년 : 네. 어제 그랬어요. 그렇게 시끄러운데 잠을 자다니. 그런 적이 처음이라 신기했고 '내가 정말 피곤한가 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상담샘 : 그래. 정말 열심히 살고 있지만 가끔은 잘 쉬었으면 좋겠어. 저기 벽에 달린 비상용 손전등 보이지? 저 손전등도 벽에 걸린 동안은 건전지 사이에 틈을 벌려 에너지를 아끼고 있어. 너도 충분히 쉴 틈을 만들면 좋겠어. 그래도 괜찮아.
소년 : 네. 스스로를 혹사시켰는지도 모르겠네요. 이야기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개운해졌어요.
상담샘 : 다행이다. 다시 시계가 빛나는 걸 보니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된 것 같아. 가기 전에 선물 하나 줄게.
소년 : 네? 뭔가요?
상담샘 : 대단한 건 아니고 지금 세상엔 없지만 앞으로 생길 자살 유가족 권리장전이야. 접어두었다가 힘들 때마다 꺼내 읽으면 도움이 될 거야.
눈을 떠보니 오늘의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주황빛 가로등이 따스하게 감싸고 그 위로 나뭇가지들이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잘 다녀왔냐는 인사를 건넨다. 어둡고 채색되지 않던 시절로 돌아가 색을 입히고 왔다. 무채색의 시절이 선명한 유채색으로 채워지자 마음 한편이 밝아졌다. 어두운 밤바다에서 꼿꼿한 빛을 하늘로 뿜던 스무 살의 등대. 덕분에 길을 잃지 않았다. 고맙다. 너에게도, 나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