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거짓말을 하는 소년

by 제갈공감
자신이 꺼낸 과거의 이야기는 80%가 거짓입니다.


길게 이어지던 연수에 집중력을 잃을 때쯤 강사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내 귀에 꽂혔다. 무슨 말인가 싶어 창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다. 일부러 거짓을 말한다는 뜻이 아니라 상처의 무게에 짓눌러 자신도 모르게 거짓을 진실이라고 생각한다는 의미였다. 특히 소중한 가족을 잃고 남겨진 이들은 죄책감으로 인해 자신의 잘못을 부풀려 기억한다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편으론 의아했다. 그토록 강렬했던 기억이 왜곡될 수 있을까?


문득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통화 내용이 가슴에 번졌다. 갑자기 찾아온 자유를 실컷 만끽하던 대학교 1학년 시절, 여름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다.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나는 아버지에게 걸려 온 전화를 귀찮아하며 받았고 평소에 자주 하지 않던 아버지의 마지막 말만 남아 있다. 아버지는 통화를 마치며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며칠 후 스스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의 부고를 들었다.


내 잘못이라고, 내 탓이라고, 마지막 전화를 귀찮아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고 끝없이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그렇게 굳어진 기억은 단단한 딱지가 되어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을 덮었다. 그런데 정말 아버지의 전화를 귀찮아했을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강의 중에 전화가 와서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전화를 한 것 같기도 하고 마침 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전화가 와서 짧게 통화한 것 같기도 했다. 처음으로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가능성들이 솟구쳤다. 그러자 비문증의 미생물처럼 눈앞을 어지럽히던 죄책감이 눈물에 섞여 흘러내렸다. 닦아도 닦아도 닦이지 않던 후회들이 사라지자 시야가 맑아졌다.

‘아, 내가 평생 믿어온 그 장면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온전히 슬픔을 견디기 힘들었기에 죄책감이 만든 거짓이었구나.’


전날, 연수를 마무리할 때 마이크를 돌려 참가자들의 소감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오늘도 소감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자 발표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떨리는 손으로 하얀 종이에 전하려는 내용을 정리했다. 떨지 않고, 울지 않고 선명하게 나의 경험을 전달하고 싶었다. 필연처럼 마지막 순서였다. 마이크를 잡고 천천히 일어섰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저에게 전화가 왔고 끊기 전에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위험 신호를 알아채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오랫동안 힘들었습니다. ‘기억이 왜곡될 수 있다’라는 말을 처음엔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억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전화가 왔을 때, 강의가 끝나고 바쁠 때였기 때문에 그냥 넘겼을 수도 있고, 심지어 강의 중 전화가 와서 제가 나중에 다시 걸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여러 가능성을 떠올린 순간, 제 마음 한 구석이 시원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제 오랜 상처를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상담 선생님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을 끝마치자, 강의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곧, 함께 연수를 듣던 동료 상담 선생님들의 박수가 시원한 폭포처럼 쏟아졌다. 옆의 선생님은 붉어진 눈으로 두 팔을 벌리셨고, 나는 어색하게 안겼다. 다른 선생님들도 내게 다가와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여운이 맴돌아 쓰러지듯 누웠다. 한참 동안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마음이 진정될 즘 새로운 궁금증이 떠올랐다. 마지막 통화에서 아버지가 남긴 사랑 한다는 목소리를 듣고 나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나도 사랑한다고 했을까? 무의식 속 깊은 심해에 가라앉은 기억은 아무리 애써도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아버지의 유품인 빛바랜 손목시계만 애꿎게 만지작거리며 잠이 들었다.


어두운 새벽에 낯선 곳을 헤맸다. 스산한 안개에 덮인 다리 위에 희미한 형체가 보인다. 천천히 다가가며 걷은 실루엣의 정체는 무거워 보이는 책가방을 멘 채 고개를 숙인 소년이었다. 조심스레 살핀 얼굴이 낯익었다. 소년은 바로 스무 살의 나였다. 놀란 마음을 감추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아빠랑 마지막 통화 때 말이야, 혹시 너는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나니?”

한참을 움직이지 않던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것보다는.... 제.... 마음이 지금 너무 힘들어요.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쏟아붓고 싶어요. 제 솔직한 마음은 그게 먼저예요.”

나는 와락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유품인 손목시계를 찬 소년은 검지로 손목시계를 톡톡 치며 앞으로 우리가 만나 이야기를 나눌 방법을 알려 주었다.

“우리가 함께 가지고 있는 이 손목시계의 초침이 다시 움직일 때마다 과거로 돌아와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제가 더 이상 울지 않을 때까지요.”


생경한 꿈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본 소년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울고 있는 내면의 아이였다. 되돌아보면 주어진 삶의 과제를 해내느라 자신을 위로하지 못했다. 아버지를 떠나보내기 위한 애도도 그저 시간이라는 약에 맡긴 채 괜찮아질 것이라 어물쩍 넘겼다. 애도의 과정 없이 버텨온 지난날의 시간과 장소마다 소년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소년들의 곁으로 다가가 온전히 그의 편이 되어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다.


내 편이 되어 주길 바라는 과거의 소년과 마지막 통화의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현재의 상담 선생님. 그동안 미뤄두었던 대화를 이제 시작하려 한다. 신비로운 빛을 뿜기 시작한 손목시계의 초침이 ‘째깍’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