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기 : 퍼렇게 멍든 날

-뒤집어 쓴 숫자 '9', 그리고 몽정

by 제갈공감

따뜻한 햇살이 내리는 상담실 책상에 앉아 오전에 있었던 상담들을 기록한다. 학생들이 쏟아내고 간 감정의 조각들을 써 내려가며 종이를 넘길 때마다 미세한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오래된 도서관의 책장 같은 냄새. 순간, 며칠 전 꿈속에서 마주한 스무살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기록을 멈추고 의자를 천천히 뒤로 기울이자 노곤함이 밀려온다. '오늘 급식이 맛있어서 너무 많이 먹었나?' 또 많이 먹어버렸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자 나른한 온기가 눈꺼풀 위로 내려앉는다. 순간, 배꼽 위에 가지런히 모은 손목 위에서 햇살보다 강렬한 빛이 번쩍인다. 의자가 온몸을 통째로 빨아들이는 감각을 느끼며 빛의 터널을 통과한다.


눈을 뜬 곳은 대낮임에도 커튼이 쳐져 있어 어둑어둑한 거실이었다. 집 전체가 퍼렇게 멍들어 있는 것 같은 이곳은 20년 전, 내가 아버지를 잃었던 집이다. 거실의 소파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소년이 보인다. 스무살의 나 자신이었지만 2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 때문인지 낯설어 보였다. '내가 저렇게 말랐었나? 참 어렸구나.' 감상에 빠질 즘 이곳에 온 이유를 다시 떠올리며 마음을 다 잡았다. 상담을 시작할 때 친해지는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과거의 나와도 첫 인사가 필요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상담샘 : 안녕? 갑자기 나타나서 많이 놀랐지?

소 년 : (힐끔 고개를 들며, 갈라진 목소리로)...아... 오셨네요. 설마 했는데 신기하네요.

상담샘 : 그렇지...하하. 나도 신기하고 좀 어색하네. 저번에 만났을 때, 많이 힘들고 답답해 보이더라구. 3일 내내 장례를 치르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많이 피곤하겠다.

소 년 : 조금 잤어요. 머리가 계속 멍하네요. 잠깐 잠이 들었다 깨어나면 지금 현실이 꿈 같아요. 그러다 아 맞다, 아빠가 돌아가신 게 맞지, 그렇지 하며 다시 깨닫곤 해요.

상담샘 : 맞아. 너무 힘들고 괴로울 것 같아. 지금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혼자있는 시간이 필요할 거야. 너무 마음이 지치면 이야기를 나누기도 힘든데 혹시 지금 이야기 나눌 순 있겠니?

소 년 : 후우...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상담샘 : 그래. 우리 천천히 이야기 하자. 이야기 하다 힘들면 쉬어가도 돼.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 내린 느낌일텐데 그래도 힘을 내서 이야기 하려는 게 대단하게 느껴져. 3일 동안 장례를 치르면서 스쳤던 생각이나 느낌을 편하게 얘기해 보렴.

소 년 :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밤엔 거실에서 잤어요. 깨어나 보니 제가 몽정을 했더라고요. 뭔가 이상했어요.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 한번도 몽정을 한 적이 없거든요. 이제 성인이고 스무살인데 몽정을 한게 신기하고 속이 젖어 찝찝했어요. 그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어요. 화면에는 큰아버지라고 젹혀 있었죠. 전화를 받기 전부터 이상한 예감이 들었어요. 전화를 받으니 아빠가 돌아가셨다고 했고, 울먹이다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물으니 산복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셨다고 하셨어요. 온몸이 떨렸어요.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이 바로 이런 느낌이구나'라고 생각했죠. 후우...

상담샘 : 선생님도 그 순간이 기억나. 커다란 총알이 가슴을 뚫고 지나간 느낌이었어. 텅 빈 가슴에 교통사고의 장면이 순식간에 차올랐고 아빠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라는 생각이 들며 눈물이 났던 것 같아.

소 년 : 맞아요. 정신없이 챙겨서 엄마랑 A도시로 갔어요. 지하 영안실의 문이 열리고 아버지를 확인했죠. 눈물 때문에 흐릿했어요. 무릎을 구부리고 아버지에게 다가가 얼굴을 만졌어요. 너무...차가웠어요.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차가울 수 있지? 그제야 실감이 났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구나...라고요.

상담샘 : 그래...그리고 뭔가 이상한 걸 느꼈지?

소 년 : 네. 검안실 담당자는 건조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어요. 사망 추정 시간은 23시에서 01시 사이. 발견 장소 00 공원. 사인은 자경부 압박 질식사, 즉 스스로 목을 매어 사망함. 그때 처음 알게 되었죠. 어떻게 된 일인지...


소년은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지만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까지 붙잡을 수는 없었다. 부풀어오르는 슬픔이 호흡을 거칠게 몰아붙였고 눈물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따뜻하게 안아주려 했지만 선뜻 다가가지 못한 채 조용히 티슈만을 건넸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속 시원히 울 수 있기를 바라며. 울음이 잦아 들때쯤 우리는 소파를 떠나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년은 타버린 기억 하나를 어렵게 꺼내놓았다.


소 년 : 아빠가 쓰시던 낡은 수첩이 있었어요. 유품을 태울 때 차마 태우지 못하고 손에 쥐고 있었어요. 사촌 형은 가지고 있으면 더 힘들다고 같이 태우라고 했죠. 결국 불길 속에 던졌지만 그 안의 내용들은 눈앞에 선명해요. 수첩에는 여러 숫자들의 조합이 6개씩 적혀 있었어요.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아빠는 로또를 하려했나봐요. 빽빽한 숫자들 위에 날카로운 빗금들이 쳐져 있었어요. 꼭 아빠의 가슴을 난도질한 상처 같아 마음이 아팠어요.

상담샘 : 마음이 시렸겠다...그 사이로 유독 눈에 띄었던 숫자가 기억이 나.

소 년 : 네, 숫자'9'요. 아빠는 9를 좌우로 뒤집어 쓰셨어요. 대학 신입생 때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된다고 희망차게 발표했는데 아빠의 뒤집힌 숫자 9를 보니 아이러니하게 느껴졌어요. 아버지가 저 숫자를 바르게 썼다면 삶의 방향도 바르게 흐르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요.

상담샘 : (소년의 손을 잡고 가볍게 두드리며)이야기를 들으니 바로 이 식탁에서 아버지가 우리의 손을 잡아주던 기억이 떠올랐어.

소 년 : 맞아요. 중학교 3학년 즈음 부모님이 헤어지시고 가끔 아빠가 집에 찾아오곤 했죠. 이 식탁에 앉아 제 손을 만지작 거리며 '참 내 손이랑 똑같이 생겼네'라고 했어요. 그때는 왜 그러시나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지금 보니 정말 많이 닮았네요.

상담샘 : 맞아.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해. 아직도 손을 보면 가끔 아버지가 떠올라.

소 년 : 네. 오늘 이렇게 와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상담샘 : 편안하게 이야기 해 줘서 나도 고마워. 음...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저 잘 자고 잘 먹는 거야. 그것조차 쉽지 않겠지. 왜냐하면 사람은 너무 충격을 받으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아기처럼 작아지거든. 상처를 치유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지. 엄마가 아기를 돌볼 때, 잘 먹고 잘 자기만 해도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힘들어도 잘 자고 잘 먹는 것을 목표로 하고 지내렴. 그러다 눈물이 나면 마음껏 울고 그걸로도 부족하면 글을 쓰거나 편한 장소에서 하고 싶은 말을 뱉으면 조금씩 기분이 나아질 거야.

소 년 : 감사해요. 근데 한 가지 궁금한게 있어요. 제가 처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밤에 몽정을 했다고 말했는데 불효자 같고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혹시 아버지와 아들이 보이지 않게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닐까요? 그래서 마지막 순간의 극심한 고통이 저에게 그대로 전해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상담샘 : 신비롭게 느껴졌나 보구나. 그건 생각하는 것처럼 부끄럽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야. 실제로 극심한 슬픔이나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중에 비슷한 신체적 반응을 경험하는 사례가 있어. 심리학자 융(jung)은 이것을 동시성(Synchronicity)라고 했어. 물리적인 거리와 상관없이 의미 있게 연결된 사건들이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이지. 특히 부모와 자식처럼 깊은 정서적 유대를 가진 사이에서는 생물학적 신호가 서로 공명하는 경우가 있어. 아주 멀리서 아빠의 마지막 고통을 함께 느낀 게 아닐까 싶어.

소 년 : 네. 괜히 죄책감이 들고 왜 그런 경험을 했었는지 궁금했는데 이제 조금 이해가 돼요.

상담샘 :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다. 이제 그만 돌아갈 시간이네. 함께 이야기를 나누니 어땠어?

소 년: 사실...선생님이 거실로 들어올 때 아빠가 돌아온 줄 알았어요. 실루엣이 너무 닮아서. 혹시 선생님은 지금 몇 살인가요? 아빠가 돌아가실 즈음의 제 미래 모습일까요?

상담샘 : (놀란 표정을 애써 감추며)응...맞아. 사실 그 나이 쯤 되었네.


우리는 짧은 악수를 나누었다. 나는 시퍼런 멍이 든 거실을 뒤로하고 천천히 문을 나섰다. 강렬한 빛과 함께 학교상담실의 나른한 온기가 다시 느껴졌다. 나는 홀린 듯 일어나 상담실 한켠에 있는 전신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꽤 나이가 든 남자가 서 있었다. 어느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던 나이에 가까이 들어선 남자. 거울 속 얼굴에서 아버지의 깊은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을 본다. 거울 속에는 내가, 아니 나를 닮은 아버지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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