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기 : 내게 달려온 사람

by 제갈공감

누구나 잊히지 않는 날이 있다. 가까운 사람이 떠나가거나 노력의 결실이 이루어진 날처럼 강렬한 감정에 휩싸인 날은 가슴에 오래 머문다. 그런 날이 내게도 있다. 그날은 억눌러둔 마음이 터져 나온 날이었고, 되돌아보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날이다.


지금 나는 빛나는 손목시계를 찬 채, 그날의 현장에 돌아와 있다. 카페 안, 과거의 내가 어떤 여자와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소중한 그날의 기억에 손때를 묻히고 싶지 않아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남자 : 공부해야 할 내용이 너무 많아요. 계속해서 봤는데 또 기억이 안 나네요. 머릿속에 지우개가 든 것 같아요.

여자 : 그래서 혼자서만 공부하면 안 돼요. 남한테 설명할 수 있어야 진짜 내 것이 된다니까. 우리 서로 문제 내고 맞추기 하자.

남자 : 시험이 논술식으로 나오니까 주제를 이야기하면 강의하듯이 알고 있는 걸 말해보기로 해요.

여자 : 좋아요. 그럼 내가 먼저 질문할게.

남자 : 네. 좋아요.

여자 : 오늘은 '가족상담'에 대해 공부하고 있으니까 가계도 그리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 봐.

남자 : 가계도는 가족구성원을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기호로 표기한 겁니다. 남자는 네모, 여자는 동그라미로 표시해요. 도형 안의 숫자는 나이를 뜻해요.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아래로 선을 연결하고 자녀들은 그 아래에 표시하죠. 이혼하면 남녀 사이를 잇는 선에 사선을 하나 그어 표시하고 누군가 사망하면 도형 위에 X표시를 합니다.

여자 : 오!! 정답입니다. 근데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네? 교회에 갈 시간이야. 수요예배가 있거든. 샘도 같이 가요.

남자 : 아니, 난 괜찮아요.


과거의 내가 고개를 젓자, 여자는 아쉬운 듯 가방을 챙기다 말고 다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거절의 이유가 단순히 바빠서가 아니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여자 : 샘, 아까부터 표정이 좀 어두워요. 교회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내가 너무 부담을 줬나요?

남자 : 그렇다기보다... 좀 무거워요. 신이 있다면 왜 내게 그런 일을 겪게 하셨을까 원망하게 될 것 같아서요.

여자 : 그런 일이요?

남자 : (잠시 머뭇거리다 나지막이) 사실, 스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죠. 그 뒤로 제 안의 무언가가 멈춰버린 기분이에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어요. 상담 공부를 하면서 '가계도'를 그릴 때마다 아버지 성함 위에 X표시를 하는 게 얼마나 손이 떨리는지... 샘은 모르실 거예요.


말을 내뱉고 나니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내 안의 가장 깊은 어둠인 '자살유가족'이라는 이름을 꺼내 보인 것은.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해 내 손등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여자 : 말해줘서 고마워요. 정말 힘들었겠네... 나, 오늘 기도 많이 하고 올게요.


여자가 떠난 뒤, 남자는 텅 빈 카페에 홀로 남았다. 시계 너머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래의 나는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저때의 나는 얼마나 외롭고 위태로운 섬이었나.


두 시간쯤 지났을까. 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남자 : 여보세요?

여자 : 샘! 저 지금 집 앞이에요. 잠깐 나올 수 있어요?

남자 : 네? 교회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꽤 되는데... 이 시간에요?

여자 : 아까 샘 눈동자가 자꾸 밟혀서요. 그냥 가면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달려왔어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어스름한 가로등 밑에 숨을 몰아쉬며 서 있는 그녀가 보였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근처 대학교 교정의 어두운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곁에 있는 온기 덕분에 견딜만했다.


남자 : 어떻게 여기까지 올 생각을 했어요. 버스도 끊길 시간인데.

여자 : 그냥요. 아까 그 이야기 듣고 나서 샘이 혼자 어둠 속에 있는 것 같아서 혼자 두기 싫었어요.

남자 :... 사람들은 자살 유가족이라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봐요. 의지가 약한 집안이라거나, 뭔가 문제가 있을 거라고. 그래서 늘 숨기기 바빴어요. 제 가계도엔 늘 비어있는 조각이 있었죠.

여자 : 샘, 가계도에 X표시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랑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아버지는 떠나셨지만, 샘을 사랑했던 마음까지 X가 된 건 아닐 거예요.


그녀의 말 한마디에 억눌러왔던 독이 터졌다.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두운 캠퍼스 교정에서, 나는 아이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여자는 말없이 내 곁을 지키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교정 한복판, 그때의 우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여자의 손등 위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얹으며 위로받던 청년의 내 모습을 보며 나는 비로소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 내 손목에서 빛나는 이 시계는 아버지의 유품이다. 한때는 증오와 슬픔의 상징이었던 이 시계가, 이제는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게 해 준 징검다리처럼 느껴진다. 저 여자가 훗날 내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내 삶의 가장 단단한 지지자가 될 것임을 그때의 나는 상상이나 했을까.


현재의 나 : (혼잣말로) 고마워. 그때 나에게 달려와 줘서.


커피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내 곁에서 잠들어 있을 나의 구원자이자 동반자인 그녀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