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잊히지 않는 날이 있다. 가까운 사람이 떠나가거나 노력의 결실이 이루어진 날처럼 강렬한 감정에 휩싸인 날은 가슴에 오래 머문다. 그런 날이 내게도 있다. 그날은 억눌러둔 마음이 터져 나온 날이었고, 되돌아보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날이다.
지금 나는 빛나는 손목시계를 찬 채, 그날의 현장에 돌아와 있다. 카페 안, 과거의 내가 어떤 여자와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소중한 그날의 기억에 손때를 묻히고 싶지 않아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남자 : 공부해야 할 내용이 너무 많아요. 계속해서 봤는데 또 기억이 안 나네요. 머릿속에 지우개가 든 것 같아요.
여자 : 그래서 혼자서만 공부하면 안 돼요. 남한테 설명할 수 있어야 진짜 내 것이 된다니까. 우리 서로 문제 내고 맞추기 하자.
남자 : 시험이 논술식으로 나오니까 주제를 이야기하면 강의하듯이 알고 있는 걸 말해보기로 해요.
여자 : 좋아요. 그럼 내가 먼저 질문할게.
남자 : 네. 좋아요.
여자 : 오늘은 '가족상담'에 대해 공부하고 있으니까 가계도 그리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 봐.
남자 : 가계도는 가족구성원을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기호로 표기한 겁니다. 남자는 네모, 여자는 동그라미로 표시해요. 도형 안의 숫자는 나이를 뜻해요.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아래로 선을 연결하고 자녀들은 그 아래에 표시하죠. 이혼하면 남녀 사이를 잇는 선에 사선을 하나 그어 표시하고 누군가 사망하면 도형 위에 X표시를 합니다.
여자 : 오!! 정답입니다. 근데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네? 교회에 갈 시간이야. 수요예배가 있거든. 샘도 같이 가요.
남자 : 아니, 난 괜찮아요.
과거의 내가 고개를 젓자, 여자는 아쉬운 듯 가방을 챙기다 말고 다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거절의 이유가 단순히 바빠서가 아니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여자 : 샘, 아까부터 표정이 좀 어두워요. 교회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내가 너무 부담을 줬나요?
남자 : 그렇다기보다... 좀 무거워요. 신이 있다면 왜 내게 그런 일을 겪게 하셨을까 원망하게 될 것 같아서요.
여자 : 그런 일이요?
남자 : (잠시 머뭇거리다 나지막이) 사실, 스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죠. 그 뒤로 제 안의 무언가가 멈춰버린 기분이에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어요. 상담 공부를 하면서 '가계도'를 그릴 때마다 아버지 성함 위에 X표시를 하는 게 얼마나 손이 떨리는지... 샘은 모르실 거예요.
말을 내뱉고 나니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내 안의 가장 깊은 어둠인 '자살유가족'이라는 이름을 꺼내 보인 것은.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해 내 손등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여자 : 말해줘서 고마워요. 정말 힘들었겠네... 나, 오늘 기도 많이 하고 올게요.
여자가 떠난 뒤, 남자는 텅 빈 카페에 홀로 남았다. 시계 너머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래의 나는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저때의 나는 얼마나 외롭고 위태로운 섬이었나.
두 시간쯤 지났을까. 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남자 : 여보세요?
여자 : 샘! 저 지금 집 앞이에요. 잠깐 나올 수 있어요?
남자 : 네? 교회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꽤 되는데... 이 시간에요?
여자 : 아까 샘 눈동자가 자꾸 밟혀서요. 그냥 가면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달려왔어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어스름한 가로등 밑에 숨을 몰아쉬며 서 있는 그녀가 보였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근처 대학교 교정의 어두운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곁에 있는 온기 덕분에 견딜만했다.
남자 : 어떻게 여기까지 올 생각을 했어요. 버스도 끊길 시간인데.
여자 : 그냥요. 아까 그 이야기 듣고 나서 샘이 혼자 어둠 속에 있는 것 같아서 혼자 두기 싫었어요.
남자 :... 사람들은 자살 유가족이라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봐요. 의지가 약한 집안이라거나, 뭔가 문제가 있을 거라고. 그래서 늘 숨기기 바빴어요. 제 가계도엔 늘 비어있는 조각이 있었죠.
여자 : 샘, 가계도에 X표시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랑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아버지는 떠나셨지만, 샘을 사랑했던 마음까지 X가 된 건 아닐 거예요.
그녀의 말 한마디에 억눌러왔던 독이 터졌다.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두운 캠퍼스 교정에서, 나는 아이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여자는 말없이 내 곁을 지키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교정 한복판, 그때의 우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여자의 손등 위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얹으며 위로받던 청년의 내 모습을 보며 나는 비로소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 내 손목에서 빛나는 이 시계는 아버지의 유품이다. 한때는 증오와 슬픔의 상징이었던 이 시계가, 이제는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게 해 준 징검다리처럼 느껴진다. 저 여자가 훗날 내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내 삶의 가장 단단한 지지자가 될 것임을 그때의 나는 상상이나 했을까.
현재의 나 : (혼잣말로) 고마워. 그때 나에게 달려와 줘서.
커피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내 곁에서 잠들어 있을 나의 구원자이자 동반자인 그녀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