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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역뿌리 Feb 08. 2018

#76 <코코> 시대착오적인 가족주의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는 멕시코 전통 장식품인 '빠뺄 삐까도(Papel Picade)'에 그려지는 미구엘의 가족사로 막을 연다. 음악을 향한 꿈을 이루기 위해 고조부(헥터)의 가출로 고조모(이멜다)는 가내 신발 수공업으로 생계를 잇는다. 그후, 미구엘의 집안은 '음악' 이라는 존재를 지웠고, 아예 가족 내에서 금기시 되었다. 그러나 남몰래 미구엘은 제 2의 델라크루즈가 되기 위해 음악을 향한 꿈을 키우고 있다. 이같은 갈등적 상황에 놓인 미구엘은 우연히 죽은 자의 세상에 가게 되고, 멕시코 최고의 가수이자 고조부(라 착각한) 델라 크루즈를 만나기 위한 여정이 영화의 주내용이다.    


죽은 자의 세상에서 미구엘이 만난 가족. <코코>의 공식 스틸컷. 


미구엘은 그의 음악적 행보를 한사코 막으려는 가족에 잠시 대항하는듯 했으나 이내 고조모와 고조부 간 묵힌 오해가 풀리면서 꿈을 '허락'받는다. 그리고 음악과 신발수공업이 합쳐져 더 화목해진 가족으로 회귀하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여느 디즈니 및 픽사의 애니메이션이 그러하듯, 따뜻한 가족주의 서사가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 '가족'이라는 큰 틀에 갇혀 무력한 개인의 서사도 돋보였다. 가족을 벗어난 미구엘은 끝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지 않는다. (고조부와 고조모로 대변되는) 가족의 승인이 떨어지고 나서야 그제야 꿈을 적극적으로 좇는다. 이는 개인의 서사가 전형적인 가족주의 서사의 장막에 가려진 듯했다.  


디즈니 및 픽사가 배치해놓은 몇 가지 장치들로 인해 관객은 자연스럽게 가족주의로 귀결되는 논리에 빠져든다. 영화 곳곳에 온전한 가족결성을 방해하는 안타고니스트가 존재한다. 일과 가정의 불가능한 양립로 인해 떠나야 했던 예술가의 삶,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동료의 살해로 인한 억울한 죽음, 그리고 긴 시간 동안 가족 간 겹겹이 쌓였던 오해들. 극적 장치들은 뒤이어 이어지는 이야기에 필연성을 부여한다.


동료 델라 크루즈는 (딸 코코를 위해 만들었던) 헥터의 노래를 빼앗아 멕시코 최고의 대중가수로 등극하고, 죽고난 뒤에도 사후세계에서 모든 이들에게 환영받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간다. 반면 헥터는 가족에게조차 기억되는 것을 거부당한 채 사후세계 곳곳을 떠돌며 점점 잊혀지고, 사라져간다. 극과 극의 삶을 보내고 있는 상황이다.

    

점점 기억이 사라져가는 코코. <코코>의 공식 스틸컷.


관객은 이때 헥터를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동앗줄이 무엇일까 고민하게 된다. 이는 곧 살아있는 직계가족 중 유일하게 헥터에 대한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코코에게 선명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오로지 미구엘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헥터와 이멜다의 진정한 화해를 전제로 온가족의 힘이 동원되어야 한다. 이야기의 갈등이 고조될 때 헥터와 이멜다의 재결합, 이로 인해 좌절되지 않은 미구엘의 꿈, 대중들에게 노래가 진실규명되는 순간, 관객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 카타르시스는 가족주의를 수긍하게 만든다.  


모든 가족주의를 힐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존재하는 시대에서 개인이 무력화되는 가족주의는 지양해야 한다. <코코>의 가족주의 서사가 아쉬움이 남는 까닭이다. 

 <코코>의 공식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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