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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역뿌리 Mar 13. 2018

#79 <무간도>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란

이 글은 <무간도>의 스포가 있습니다.




'나는 거짓으로 살았다. 내가 어떻게 보여질까만 생각했다'


SNS 스타가 되려다가 수억원의 빚더미에 앉게 된 여성의 발언이다. 기사에 따르면 그녀의 화려한 '듯'한 삶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종착지가 빚더미였을 뿐. 그녀는 과연 종착지를 몰랐을까. 그렇지 않다. 그녀는 어떠한 파국에 이를지 알면서도 계속해서 과한 소비를 일삼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녀 '존재'에 대한 증명이다.


자기 PR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존재를 증명받고자 한다. 그것이 신분을 짐작할 수 있게끔 하는 SNS 사진일 수도 있고, 신분이 명시된 명함일 수도 있다. 객관적인 지표일 수록 존재에 대한 신뢰도는 높아진다. 바꾸어 말하면 객관적인 지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줄 사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존재를 인정받을 수 없다.


이 영화에는 존재를 숨겨야만 존재할 수 있는 두 남자가 있다. 바로 경찰에 잠입한 범죄조직 측 스파이 '유건명'과 범죄조직에 잠입한 경찰 측 스파이 '진영인'이다. 두 사람은 10년 간 상대방의 진영에서 '스파이'라는 신분을 감춘 채 살아간다. 자칫 실수라도 해서 신분을 들키는 날에는 여태껏 지키고자 했던 그들의 조직이 무너질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조직에 대한 사명감으로 전력투구했던 지난 나날들을 지키기 위해 더 필살적이었을 테다.


그러나 유능한 첩자와 첩자의 대결은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기 마련이다. 그들의 두뇌싸움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과 박진감을 자아낸다. 경찰과 범죄조직은 각 조직에 잠입한 상대 진영의 스파이를 알아내는 데 혈안이 된 상태에서 두 스파이는 자신의 신분을 더 감추고자 노력한다. 쫓고 쫓기는 관계에서 신분을 숨기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더이상 불가능한 상황에 다다르자 '유건명'은 경찰의 상사인 황국장을 이용해 상대측의 스파이를 처단하고자 한다. 진영인을 만나러 가는 황국장에 미행을 붙여 그가 사실 스파이였음을 경찰들에게 각인시키고 진영인은 죽이려는 것이다.  


황국장의 죽음을 목격한 진영인. 표정을 숨길 수 없다.  <무간도>의 스틸컷.


결과는 실패다. 진영인을 처단하기는커녕, 계획에도 없던 황국장이 죽는다. 유건명은 자신이 살고자 미끼를 놓았을 뿐, 이같은 참담한 결과를 원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적잖이 당황해한다. 한편, 진영인은 황국장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했지만 시체를 거두기는 커녕 슬픈 내색조차 하지 않는다. 황국장은 청년 시절부터 그와 가장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자이자 유일하게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자다. 그러나 현재 보는 눈들이 많은 곳에서 자신의 정체가 탄로라도 난다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이다. 황국장의 죽음이 헛되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그의 진짜 신분을 유일하게 증명하는 자가 죽었기에, 지금 발각되었다가는 그는 어떤 곳에도 속할 수 없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된다. 진영인 뿐만 아니라 유건명도 '선(善)'의 회복인지 사명감인지 모를 무언의 '선'을 위해 둘은 합심하여 결국 범죄조직의 두목 '한침'을 죽인다. 두목이 죽음으로써 모든 게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이 때부터 두 스파이의 또다른 싸움이 시작된다. 이미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정한 유건명과 더이상 있을 필요 없는 조직에서 벗어나 다시 본래의 삶을 되찾고자 하는 진영인. 두 스파이는 각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줄 '신분'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한다. 누군가는 신분을 되찾고자 하고, 다른 누군가는 신분을 유지하고자 한 채 진정한 대결, 어쩌면 애초부터 시작되었을 실존을 향한 대결이 펼쳐진다.


존재이자 신분을 보장받기 위한 두 남자의 싸움. <무간도>의 스틸컷.


마지막에 옥상에서 두 스파이가 마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누군가는 신분을 보장하라고 외치고, 누군가는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한다. 서로 옥신각신하는 가운데 경찰(로 위장한 '한침'의 또다른 스파이)이 나타나 여태껏 보장받지 못한 신분을 찾고 싶은 자에게 총을 겨눈다. 진영인을 죽인 후, 경찰은 유건명에게 자신도 사실 '한침'의 스파이라 밝힌다. 그러나 엘레베이터 안에서 그는 유건명에게 처참히 죽임을 당한다. 그 또한 유건명의 신분 유지, 그러니까 존재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는 요인이므로.    


유건명은 두 남자가 죽어 있는 엘레베이터에서 나와 경찰들에게 '경찰'이라 쓰인 자신의 신분증을 들어보인다. 어떠한 상황이 펼쳐졌든 간에, 그 명함 하나로 모든 상황을 설명한다. 그것이 가장 객관적으로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지표이기에 경찰들은 그의 존재를 신뢰하고,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을 것이다.  


가장 심한 지옥이자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의 '무간도'. 유건명과 진영인은 존재가 누군가에게 증명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라고 요구받고 끊임없이 증명하고자 노력하는 현 사회도 어쩌면 무간도와 같지 않을까.


신분증을 들어보이는 유건명. 그의 존재를 증명받을 수 있는 도구다. <무간도>의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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