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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역뿌리 May 02. 2018

#85 <빅 피쉬> 모두가 즐거울 수 있다면

이 글은 팀 버튼의 <빅 피쉬> 스포가 있습니다. 



  

  팀 버튼의 <빅 피쉬>는 어느 집안에서 볼 법한 부자간의 갈등을 담는다. 어느 가족 영화의 갈등이 그러하듯 갈등 속 두 주인공은 그야말로 상극이다. ‘빅 피쉬’급 이야기(아들이 태어나던 날, 강에서 고군분투 끝에 큰 물고기를 잡았다는 아버지의 믿지 못할 무용담)를 시도 때도 없이 불러오는 천상 이야기꾼 아버지 에드워드 블룸(이완 맥그리거)과 이와 같은 허구의 이야기를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줄곧 들어온 결과 이제는 도입부도 듣기 싫을 정도로 진절머리가 난 아들 윌 블룸(빌리 크루덥). ‘이야기’를 바라보는 두 주인공의 시각차는 관객에게 이야기 자체에 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사실이 부재한 이야기는 오직 이야기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관한 답은 객관적인 사실만을 좇는 윌이 허구의 이야기만을 꾸며내는 에드워드를 이해하는 과정 속에서 차례로 제시된다. 첫 번째는 두 부자의 갈등 이후 첫 대화 씬에서다.


아버지 에드워드 블룸의 청년 시절 이야기는 모두 허구 속 인물과 함께 환희로 가득 차 있다. ⓒ <빅 피쉬> 스틸.  


“아버진 산타 같아요. 매력적이지만 가짜인”

     

  시간이 흘러 어린 꼬마는 곧 예비 아빠라는 막중한 역할을, 그리고 건장했던 아버지는 병세가 위독해져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윌은 아버지의 스토리에 빠져 지내던 유년기의 나날들과 비교하며 애증의 관계에 놓인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되짚어보고 있을 것이고, 에드워드 역시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인 아들을 비롯해 파란만장했던 그의 인생들을 하나씩 곱씹고 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에 윌은 용기 내어 그간 에드워드가 들려준 이야기 속 진실에 관해 묻는다. 불통이라 생각했던 아버지에게 십 여 년 만에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시도하는 셈이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객관적인 사실을 말해주기는커녕 못다한 자신의 모험담에 살을 덧붙이는 등 또다른 이야기를 재생산할 뿐이다. 한쪽 눈알로 미래를 보는 마녀 이야기, 거인과 늑대인간 이야기, 어느 기괴한 마을 이야기까지. 어릴 적부터 지겹도록 들어왔고,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들의 스핀오프 버전이라니. 진실을 묻는 윌에게 참으로 명쾌한(그를 단념시키는) 답변이 아닐까 싶다.     

     

그의 이야기는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 <빅 피쉬> 스틸.


  이쯤이면 관객은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상상 속 이야기를 붙들고 있는 에드워드가, 자신의 과거를 거짓으로 포장하면서까지 이야기꾼을 자처하는 그의 의중이 궁금해진다. 허풍을 떨 수단이라면 수많은 시간들을 스토리텔링으로 탕진하진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그의 이야기가 진실이 아님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세계 정도는 돼야 거인이나 늑대인간을 목격할 법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단지 그는 사실을 부정한 허구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평생을 바칠 정도로 이야기를 꾸며내는 데에 혈안이 된 것일까.        

 

그에게 위안을 주거나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야기었을 테다.ⓒ <빅 피쉬>의 스틸. 
“물고기나 반지 같은 걸로 꾸며진 얘기와 그냥 진실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라도 더 환상적인 쪽을 택했을 거야”

  이 물음에 대한 답이자 영화의 두 번째 답은 아들이 아버지의 주변인물을 통해 진실을 듣는 씬에서 드러난다. 에드워드가 무의식 상태에 있을 때, 윌은 자신이 태어나던 날에 우연히 큰 물고기를 잡았다는 이야기 따위가 아닌, 실제 벌어진 사건에 관해 듣는다. 그런데 이야기의 진실을 듣고난 후 개운할 줄 알았던 윌은 오히려 숙연해진다. 당시 출장 탓에 출산의 순간에 곁을 지키지 못했다는 초라한 진실을, 아버지가 그토록 이야기로 포장해 숨기고 싶어 했던 진실을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날을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가득한 날로 기억하는 당사자는 사랑하는 아들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어느 영웅의 비범한 탄생에서 볼 법한 ‘빅 피쉬’를 불러와 흥미진진한 모험담으로 꾸며냈다. 비록 손에 잡히지 않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일지라도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고, 언제든지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야기’이기에.    

     

  에드워드의 이야기 속 단골인물, 한쪽 눈알로 미래를 보는 마녀의 이야기도 어느 외딴 마을의 소외된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진실은 아니지만 당시 현실과 맞닿아있는, 당시 이야기꾼의 애정이 잔뜩 묻은 이야기들 말이다. 그러므로 사실이 부재해도 이야기는 이야기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다. 이야기꾼의 얼토당토않은 상상력과 주변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이 있다면 어느 것이든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 명쾌한 해답을 영화는 아버지의 과거사, 부자관계의 갈등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과 같은 길고 긴 서사를 거쳐 제시한다. 이야기꾼의 정신에 위배되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단박에 알려주면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듣는 이 또한 이 길고 긴 서사를 점프컷하여 답만 달랑 듣고 싶지는 않다. 과정 속에서만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암묵적으로 지켜온 이야기의 룰은 분명해진다. 실상, 이야기의 사실여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즐거울 수 있다면!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이야기꾼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 <빅 피쉬>의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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