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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역뿌리 May 10. 2018

<라이크 크레이지> 낭만적인 사랑의 이면

<라이크 크레이지>의 스포가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이별은 곧 달콤한 슬픔이라 했다. 슬프지만 달콤한 것. 이별을 설명하는 두 단어의 조합은 역설적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수긍이 간다. 기나긴 스토리를 통해 그토록 절절할 수밖에 없었던 로미오와 줄리엣의 상황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 간 사랑의 골짜기가 깊은 만큼, 그들의 집안 간 증오와 반목의 골도 깊다는 것. 둘의 사랑이 이뤄질 수 없음을 알기에 상대적으로 이별이 서로의 곁에서 이뤄지는 상황이 달콤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필연적으로 이 연애 소설의 끝이 비극으로 귀결될 것을 알기에 두 남녀가 함께하는 시간이 더 애틋할 수밖에 없다. 그 시간 속에 있는 서로의 존재가 더 소중한 것은 당연지사다. 마치 이뤄지지 않는 첫사랑의 잔상이 오래토록 가슴 한켠에 남아있듯.

     

서로과 서로에게 운명과도 같다면. ⓒ <라이크 크레이지>


  <라이크 크레이지>에서 미국 남자 제이콥과 영국 여자 애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교환학기로 LA의 대학에 간 애나는 제이콥과 사랑에 빠진다. 매일 같이 밥을 먹고, 매일 같이 취향을 공유하며 그들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운명적인 존재라 느낀다. 한창 서로에게 함몰되던 도중에 애나는 학생비자가 만료되어 영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사랑이 불타오르던 나머지, 애나는 가지 않겠다고 어리광을 부린다. 비자 문제로 입국 금지령이 떨어질 수도 있는 미래를 모르는 것은 아니겠거니와, 사랑이라는 강력한 감정 앞에 어떤 이성적인 판단도 무너지는 법이다. 일단 눈앞에 보이는 감정부터 끄고 보자. 애나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대신, 한시라도 제이콥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역시는 역시라고 했던가.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애나는 사촌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영국을 들른 후 다시 미국으로 입국하려고 하는 순간 과거의 비자 문제로 제지당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입국금지령이라는 울화통 터지는 불화가 떨어진다. 둘은 절망한다. 8시간이라는 시차로 서로의 연락이 엇갈리는 상황 앞에서 맥이 빠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늘 함께 만들어가던 일상들은 차츰씩 각자의 일상으로 덧칠되었다. 애나에게 의자를 만들어주었던 제이콥은 가구 만드는 업종에, 글을 쓰던 애나는 잡지사에 취직한다. 서로를 잊은 채(어쩌면 잊기 위해) 둘은 바쁜 일상을 살아간다.   

     

ⓒ <라이크 크레이지>


  “자니?” 카톡짤로 돌아다니는 야심한밤 전 애인의 문자. 술 한 잔 마시고, 달이 기우는 밤이면 한때 나의 ‘그대’였던 사람이 떠오른다. 애나는 제이콥에게 “네가 그리워” 라고 문자를 보내고, 그 한마디에 홀린 듯 제이콥은 애나를 찾아온다. 둘은 그렇게 재회한다. 떨어져 있는 시간만큼 서로에게 애틋한 그들은 본격적으로 장거리 연애를 시작한다. 제이콥이 미국과 영국을 왕래하며, 둘은 입국금지령이 걷어지기만을 기다린다.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는 꿈같은 결혼을 꿈꾸며.

     

  공교롭게도 결혼은 꿈에 불과했다. 그들의 현실적 상황은 녹록치 않다. 입국허가령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기다림에 지친 둘은 또 좌절을 겪는다. 좌절을 넘어 이제는 서로의 내면을 긁어 상처까지 내기 일쑤다. 서로에게 아픈 이야기임을 알지만, 각자 떨어져 있을 때 애인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지는 않은지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심지어 제이콥은 샘(제니퍼 로렌스/미국에 있을 때 전 여자친구)과 연락을 주고받으면서도 애나에게 거짓말을 일삼는다. 둘의 관계는 이미 끝난 셈이다. 한때 믿음으로 똘똘 뭉친 사랑이 대수였던 그들의 관계에서 신뢰란 도통 찾을 수 없는 단어가 되었다.

     

  그렇게 또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미국에서 제이콥은 샘과, 영국에서 애나는 사이먼(찰리 뷰리)과 행복한 나날들을 보낸다. 맞춤정장처럼 자신과 가장 잘 맞았던, 운명인 줄로만 알았던 지난 사랑을 애써 지운 채 새로운 사람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다시 키워가기 시작한다. 강렬했던 감정만큼 애초에 없던 사람인 마냥 살아간다.

     

우린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까. ⓒ <라이크 크레이지>


  끝인 줄로만 알았던 영화는 여기서 결말을 맺지 않는다. 극적인 입국허가령으로 두 남녀는 재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를 마주했을 때, 둘의 시선은 상대방의 어깨너머 허공에 놓인다. 과거에 행복했던 순간들로 가득한 상념에 빠진다. 제이콥과 애나는 알고 있다. 다시 만났지만 우리의 관계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임을. 멀고 먼 길을 돌며 의심, 분노, 애증 등 서로에게 느꼈던 복잡한 감정과 기다림과 좌절을 경험하며 생긴 무기력함. ‘사랑’이라는 무기로 서로에게 불리한 현실을 만들었고, 그 현실은 서로를 아프게 했다. 비극적이지만 낭만적인 사랑으로 치부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에선 찾아 볼 수 없는 현실의 감정들이다. 현실적인 상황을 무시한 채 나아가는 사랑은 설령 낭만의 끝을 달리지라도 결코 순조로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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