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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역뿌리 Oct 21. 2019

#1 에너지 뱀파이어  

“그래서 결론이 뭔데?"

나는 A의 토크쇼를 중단시켰다. 남자친구와 만나게 된 모든 과정을 풀스토리로 들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 ‘썸남’이 지금의 남친이 되었다는 사실을.  눈에 띄게 줄어든 연락빈도와 그의 카톡프로필 배경에 박제된 커플티 사진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결론만 듣자고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겠거니와 그녀의 사랑꾼 썸남의 러브 스토리를 한 시간 가량 듣다보면 이야기를 종식시키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겼다.

     

A와 이야기하면 유령이 된 것 같았다. 자기자랑이 주를 이루는 그녀의 토크와 나에게 기대하는 일종의 공감 리액션-끄덕임,‘아~’-은 언제나 날 치치게 했다. 내 이야기를 하려고 말문을 떼면 그녀는 다시 자기 이야기로 돌아왔다. 나의 기를 빼앗아먹는 일종의 ‘에너지 뱀파이어’일까. 그러나 나는 그녀와의 오래된 친구였기에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제 남아있는 친구가 내가 유일했기에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을 친구로서 최고의 미덕이라고 여기며 나의 피 같은 시간을 내주는 것을 자처했다.

     

사실, 얼마 가지 못했다. 취업 준비 시기가 겹치면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녀만의 공감요정이 되는 것도 신물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우정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나의 자유를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의 고민 끝에 찾은 방법은 바로 ‘신점’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무릎을 탁 칠 정도로 용하지는 않지만 A에게 200% 효과가 있는 ‘B급 신점’. 우연히 함께 방문한 신점 카페에서 A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고, 유령에 빙의한 신궁은 그에 맞는 미래를 점쳐주었다. 항상 좋은 점괘가 나왔고, 불운이 나와도 곧 길한 운을 점쳐주었기에 우리는 주기적으로 신점투어를 다녔다. 이제 A도 나보다는 신궁을, 신궁이 모시는 유령을 더욱 더 신뢰하게 되었다. 어쩌면 친구보다, 무당이 나을 지도 몰랐다. 듣고 싶은 이야기만 해주었기에 A도 행복해했고, 나 역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한 번은 A가 꼭 가고 싶다고 두세달 전부터 용하다는 점집을 예약했다. 최대 관심사인 ‘결혼’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혹여나 좋지 않은 말을 하지 않을까 떨리는 마음으로 신궁 앞에 앉는 순간, 신궁은 유령에 빙의된 듯 말했다.

“왼쪽에 너는 평생 결혼은 안돼”

A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확신에 찬 표정으로 신궁은 그녀를 가리켰기 때문이다. 나는 안절부절하며 그래도 좋은 운이 생기지 않을까요, 운을 띄웠지만 신궁은 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절대 못해! 라고 버럭 소리질렀다. A는 자리를 벅차고 나갔다



그 이후로 A는 신점 보러가자는 말을 일체 꺼내지 않았다. “그거 다 사기잖아”라고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보이는 것이 마지막 그녀의 신점 후기였다. 다시 A는 나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고민까지 한 시간 가량의 토크쇼를 펼쳤지만, 그럼에도 나는 무당처럼 악담을 할 용기는 없었다. 이야기 듣는 게 뭐 어렵다고, 나라도 묵묵히 들어주는 게 낫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에너지뱀파이어의 희생양이 되기를 자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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