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 한 캔이 내게 알려준 것들

_리퀴드 데스를 보며, 가구를 짓는 나에게

# 물 한 캔이 내게 알려준 것들

— 리퀴드 데스를 보며, 가구를 짓는 나에게


*


어느 날, 물 한 캔을 보았다.


이름은 '리퀴드 데스'.


캔은 맥주처럼 생겼고, 그 안에는 생수가 들어 있었다.


물인데, 맥주보다 더 센 인상을 남기는 물. 이상한 일이다.


처음엔 웃겼다. 그러다 곧 무서워졌다. 왜냐면 이 브랜드는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아무도 생각 못한 방식으로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캔을 한참 바라보았다. 마치 누군가가 나에게 "넌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냐?"라고 묻는 것 같았다.


*


나, 가구를 짓는 사람에게 찾아온 불편한 진실.


가끔은, 내가 만든 가구가 너무 착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쁘고, 튼튼하고, 누구에게나 어울릴 법하고, 기능적이며, 설명이 필요 없는 것들. 완벽한 모범생 같은 가구들. 선생님이 좋아할 만한 가구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가구들은 재미없다.


아니, 재미없다는 게 문제가 아니다.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그런데 리퀴드 데스를 보며 문득 깨달았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늘 불편한 아름다움이었다.


때로는 지나치게 솔직해서 당황스럽고, 어딘가 이상하게 보여서 두 번 보게 되고, 나도 모르게 따라 하고 싶어지는... 그런 것들 말이다.


그건 단순한 생수가 아니었다. 브랜드라는 '입장'과 '표현' 그 자체였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입장 없는 가구를 만들어 왔다.


*


내 가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나는 묻는다.


"내가 만든 이 가구는 어떤 사명을 가지고 있지?"

"이건 누구를 위한 분노이고, 누구를 위한 위로인가?"

"이건 얼마나 솔직한 몸짓인가?"


대답은 침묵이다.


내 가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거기 있을 뿐이다. 착하게. 무해하게. 지루하게.


단순히 예쁜 것과,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사이엔 뚜렷한 경계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경계 위에 서고 싶다.


아니, 서야 한다.


*


지루한 건 죄다.


리퀴드 데스는 말했다.


"우린 생수 브랜드가 아니야. 유튜브 인플루언서와 경쟁하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야."


미친 소리처럼 들리지만, 한편으론 가장 정확한 자기 정의였다.


그들은 물을 파는 게 아니라 태도를 팔고 있었다. 생수 시장에서 싸우는 게 아니라 어텐션 이코노미에서 경쟁하고 있었다.


그게 답이다.


나도 그래야 한다.


나는 가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공간을 다시 정의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의 취향과 인생을 조용히 응원하는 디자이너여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조금 더 대담하고, 조금 더 불편하며, 조금 더 미쳐 있어도 괜찮다.


사실, 미쳐 있어야 한다.


*


이젠, 나를 위한 가구를 짓는다.


리퀴드 데스는 말한다.


"모두가 널 좋아할 필요는 없어. 네가 진심인 걸 사랑하는 이들만 있으면 돼."


맞다.


가구도 마찬가지다. 세련되게 보이려는 욕심보다, 딱 한 사람에게 강하게 꽂히는 진심이 필요하다.


만족하려는 사람의 수를 줄이면, 만족의 깊이가 깊어진다. 이건 수학이다.


그러니 이제는 이렇게 묻는다.


"이 가구는 누구의 '갈증'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졌는가?"


누구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인가?

누구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인가?

누구의 꿈을 응원하기 위해서인가?


답이 명확하지 않다면, 그 가구는 만들 가치가 없다.


*


물 한 캔이 내게 말했다.


지루하지 말라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나만의 미친 이야기를 하라고.


그래서 오늘 나는, 조금 더 솔직한 가구를 그려보려 한다. 그리하여 누군가의 방 한 구석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는 무언가가 되기를 꿈꾸며.


모든 사람이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한 사람이라도 그 가구 때문에 하루가 조금 더 견딜 만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게 내가 배운 것이다.


물 한 캔에게서.




— 나에게 보내는 편지, 리퀴드 데스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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