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13. 02:18
# [하드보일드] 내가 담가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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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하드보일드'는 일종의 애티튜드라고 한다. 목적이 아니라, 시선이고 생존방식이라고.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고 알기에 '힘껏 살아가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처럼,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은 것.
참 거창한 말이다. 하지만 결국 '어떻게든 버텨보자'는 뜻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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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폭력배는 맞닥뜨리기에 상당히 공포를 주는 존재다.
하지만 가끔 조직이 나오는 소설이나 영화를 본다. 재밌다. 어쩐지 나와는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해 흥미롭기도 하며, 조직폭력배의 모습이 멋있어 보이기까지 할 때가 있다.
이상한 일이다. 무서우면서 멋있다니.
왜? 정말 왜 그럴까?
아, 인간이라는 동물이 원래 이상하니까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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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내면에 다듬어지지 않은 공격성이 내재되어 있다.
이건 팩트다. 과학적 사실이다. 사회적 발달을 하면서 이런 공격성을 무의식적인 차원으로 깊숙이 숨긴다. 마치 쓰레기를 바닥 밑으로 쓸어 넣듯이. 하지만 쓰레기는 언젠가 냄새를 풍기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굉장히 우려한다. 그래서 터뜨리지 않는 대신 이 마음을 저 멀리 내던져버리는 쪽을 택한다.
이것을 '투사'라고 부른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이 만든 그럴듯한 용어다.
조폭이 이 투사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내 공격성을 투사한 악이고 나는 선한 존재로 분리해서 받아들인다. 그럼으로써 나의 '선'을 불안하게나마 지킨다는 것이다.
참 편리한 시스템이다. 내가 나쁜 놈이 되지 않으면서도 나쁜 마음을 해소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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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들의 우두머리는 멋있어 보인다.
이게 문제다. 무서워하면서 동시에 멋있어한다니.
그들은 우리에게 생각을 토로하라느니, 방안을 강구하라느니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하라'라는 말뿐이다.
얼마나 시원한가. 회사에서 매일 듣는 "의견 좀 내봐", "창의적으로 생각해 봐", "win-win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봐" 같은 말에 비하면.
이는 난세일수록, 원초적 불안감이 강해질수록 사람들이 원하는 리더십이다. 아무 생각 하지 않아도 그를 믿으면 해결될 수 있을 거란 마음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참 피곤한 제도다. 모든 사람이 생각해야 하고, 토론해야 하고, 합의를 이뤄야 한다. 반면 독재는 간단하다. 한 사람만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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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 안에서 터져 나온 것이니 강하면 강할수록 더 무섭게 느껴질 것이고 어떻게든 멀리 두고 싶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꿈꾼다.
"내가 너한테 신세 많이 졌다. 내가 딱 하나 해줄게. 네가 정말 싫은 놈 있으면 얘기해라. 내가 담가줄게."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나지막하게 결기 있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해주는 건달 친구가 한 명쯤은 있기를.
참 유치한 꿈이다. 마흔이 넘어서 이런 꿈을 꾼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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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치해도 어쩔 수 없다. 인간은 원래 유치한 동물이다.
현실에서는 "법적으로 대응하세요", "참으세요", "시간이 해결해 줄 거예요" 같은 말만 듣는다. 전부 맞는 말이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속 시원하지 않다.
때로는 옳지 않은 방법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법보다 주먹이, 참음보다 복수가, 시간보다 즉석해결이.
물론 진짜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 하지만 상상만으로도 카타르시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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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밤이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기 딱 좋은 날씨다. 빗소리는 생각을 키우고, 어둠은 상상을 자극한다.
밤걷는이의 글이다. 유치하고 비현실적이지만, 그래도 솔직한.
어차피 인생이라는 게 유치하고 비현실적인 꿈들의 연속 아닌가. 그중에 하나쯤 조폭 친구가 있어도 되지 않을까.
물론 진짜로는 만나고 싶지 않다. 상상 속에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