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08. 00:14
# 내일을 준비하는 전우들에게 바침
[고지전(高地戰) & 전선야곡]*
2015.06.08.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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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전장이다. 마음속에 지옥을 품고서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은 공평하다고 한다. 하늘은 항상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준다고 한다. 그것이 조금 빨리 올 수도, 조금 늦게 올 수도 있지만 나름의 한계치를 시험받을 때는 반드시 온다. 아직 그런 때가 오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행운아다.
그것이 없는 인생이라면 정말 축복받은 것일 텐데, 그런 행운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사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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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전장에서 준비되지 않은 죽음은 무효다.
한동안 그리 지옥을 품고 살았다. 지금도 또한 나름의 지옥을 품고 살고 있다. 한때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해서는 안 될 생각까지 했었다. 지옥의 한계치에 달하면 그리도 사랑했던 이들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회사를 가는 것 외에는 일절 밖 출입이 없었다.
불 꺼진 주말은 그야말로 번민의 세월이었다.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 약으로 연명하며 신께 목숨을 거두어 달라 기도했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달라 기도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여달라 빌었다.
그런데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삶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끝나지 않는 전투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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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은 작은 불씨를 지키고 있다. 누군가가 유리멘탈이라 했던 그 작은 불씨 같은 것을. 그래, 지금은 조금 편안하게 살아보려 노력한다.
항상 '평안하시라' 드리는 말씀이 나에게는 더욱더 간절한 탓이리라. 쓰고 보니 그때의 회상이, 회한이 다시금 나를 힘들게 한다.
10분 이상을 고민하지 말자. 그 이상의 고민은 내 손을 떠난 것임을. 조금은 나를 편히 대하자. 살아보자. 살아남아 삶이 나를 기억하게 하자. 그래서 오늘도 줄기차게 나의 기록을 남긴다. 기록의 적자생존을 믿으며, 오늘도 이 자위하듯 써 내려가는 글들.
살아남자. 살아남아 가족에게 돌아가자. 이것이 모든 전쟁의 궁극적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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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고지전'에서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부대원을 독려하기 위해 중대장이 중대원들에게 던진 대사가 심금을 울렸다.
"우리 중대는 이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미군으로부터 악어중대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왜 악어인지 아는 사람... 악어는 50개 정도의 알을 낳는다. 그중 절반 이상이 다른 짐승한테 먹힌다. 그리고 간신히 알에서 나온 새끼 악어 대부분이 또 다른 짐승의 먹이가 되고, 고작 한두 마리가 어른 악어로 자란다. 근데 말이야. 그 한두 마리가... 50개 중에서 살아남은 고작 그 한두 마리가 늪을 지배한다. 그게 악어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우리가 악어고, 우리가 전장을 지배한다. 누가 가장 강한가! 누가 가장 독한가? 살아서 집에 가자."
이 대사는 단순한 영화 속 대사가 아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 모든 민족이 겪어야 하는 생존의 법칙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전장을 지배한다. 그래, 우리가. 준비 없이 이 전장터에 내쳐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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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진행되던 당시의 이야기다. 방첩대 장교인 강은표 중위가 상부로부터 적과 내통하는 반역자를 색출하라는 명령을 받고 애록고지로 발령 나면서 시작된다. 현재의 백마고지, 애록고지... 이 땅의 모든 고지는 피로 물들었다.
장장 30여 개월간, 그러니까 휴전협정 작업이 시작되면서부터 전개된 이곳의 전투는 하루에도 3~4번 그 주인이 바뀌고, 양군의 시체가 온 능선을 뒤덮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된 곳이었다. 역사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와 목숨으로.
백마고지 전투는 휴전협정이 조인된 후 발효시기까지의 마지막 12시간의 기록이다. 그 시간 동안 누군가는 차지해야 할 고지를 두고 어느 누구도 원치 않는 마지막 전투를 치르기 전 양군이 서로를 위해서, 그리고 그 자신들을 위해 불러주는 '전선야곡'으로 그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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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야곡(戰線夜曲, 1951)*
유호 작사 / 박시춘 작곡 / 노래 신세영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거운데*
*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 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 그 목소리 그리워*
이 노래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다. 이것은 모든 전쟁에서, 모든 시대에 불려진 인간의 애가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살아서 돌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
우리는 모두 각자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살아서 집에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모든 투쟁의 궁극적 의미다.
전쟁은 끝나지만 삶의 전쟁은 계속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살아남을 의지가 있고, 돌아갈 고향이 있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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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이후 항상 평안하기를.
이하 '밤걷는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