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9. 5:17*
# 이 밤 오붓이 쓰리라
*履霜堅氷至*
*2013. 11. 9. 5:17*
*
퇴근길이었다.
어느 이의 글에서 오롯이 싹을 틔운 봉숭아의 여린 잎을 보았다. 그 연약한 초록빛을 보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저려왔다.
차라리 서리를 맞고 눈을 뒤집어쓴 구절초이기라도 할 것을. 차라리 매운 야생화의 모습을 하고나 있을 것을. 그 여린 것이 견뎌낼 수 있을까. 아니, 견뎌내야만 하는가.
무엇인가.
좋은 비는 때를 가려 내린다고 했던가. 별 하나 없는 괴괴한 하늘이 더욱 적막하다.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에 이른다 했으니, 履霜堅氷至 (이상견빙지).
기시감 같은, 슬픈 예감. 통속의 가사 같은 말이지만 피할 수 없는 진실이기도 하다.
밤이 깊어지고, 가을이 깊어간다. 곧 겨울이 올 것이다.
*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적막한 거리는 이제 조금은 놓으라 한다. 무엇을 놓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이 기나긴 밤이 묻는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황진이가 그렇게 노래했다. 긴긴 겨울밤, 그 동짓달 밤이 혼자 있는 이에게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 것인가. 오백 년 전의 그 밤과 지금 이 밤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는가.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나에게도 이 밤이 얼마나 길어질 것인가. 한 토막을 뚝 떼어내 따뜻한 이불 아래 여며 두었다가, 어룬께서 온 날 밤... 오붓이 오롯이... 쓰리라.
*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바뀌지만, 기다림의 정서는 변하지 않는다. 봉숭아든 구절초든, 모든 것은 제 때를 기다려야 한다. 서리가 내려야 얼음이 얼고, 얼음이 녹아야 봄이 온다.
나는 이 밤을 견디고, 또 다른 밤을 견뎌낼 것이다. 여린 봉숭아처럼 이 아니라, 매운 야생화처럼. 아니면 적어도 구절초처럼은.
그렇게 견뎌내다 보면, 언젠가는 따뜻한 이불 아래 서리서리 접어둔 그 밤을 펼쳐볼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