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23. 2:37*
*망치든건축가 hyojoon*
2012. 7. 23.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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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와 에어컨과 어린왕자
양지바른 작업실에서 온종일 더위에 찌들어 있다가, 손톱을 깎고 커피를 만들어 얼음 띄운 걸 마시며 노트북을 열었다.
그러다 문득 b612호가 떠올랐다.
나의 작업실과 b612호? 참 뜬금없는 연상이다. 화성과 목성 사이 어딘가에 있다는 그 작은 행성과 이 좁은 작업실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생각해보니 비슷한 구석이 있다. 둘 다 작고, 둘 다 외롭고, 둘 다 장미 하나쯤은 키우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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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자라는 신분
핸드폰이 울렸다. 예전 작업 문의였다.
"근데 어디시죠?"
"아, 업잔데요."
"아~ 업자..."
이 한 마디면 모든 게 정리된다. 신기한 일이다.
업자. 참 묘한 단어다. 뭔가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정작 뭘 하는지는 애매하다. 하지만 업자끼리는 통한다. "선수끼리 뭘 그래?"라는 식으로 말이다.
문제는 일반인들이다. 이들에게 "업자"라고 하면 뭔가 수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뭐 하는 사람이세요?"
"업자요."
"...뭔 업자요?"
그래서 요즘은 "인테리어 설계 및 디자인 비스무리한 걸 합니다"라고 말한다. 길긴 하지만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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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공짜라는 착각
그런데 더 웃긴 건 이거다.
"인테리어 업자 부르면 디자인은 그냥 해주는 거 아녜요?"
이게 뭔 소리인가. 그럼 의사한테 가서 "진료는 그냥 해주는 거 아녜요?"라고 할 건가?
하지만 사람들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디자인은 공짜라고. 머리 쓰는 건 돈이 안 든다고.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긴다:
"주말에 50평 단독주택 도면 하나만 그려줘."
"브랜드 로고 하나만 해줘. 간판 만들어야 하거든."
그럼 나는 뭔가? 자선사업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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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자 vs 디자이너의 딜레마
그래서 요즘은 이렇게 말한다.
"그냥 해주는 건 업자라서 그런 거고, 저는 디자이너라 디자인비를 받아요."
그럼 나는 대체 뭔가? 업자인가, 디자이너인가?
솔직히 그런 인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망치를 들었지만, 참 만만치 않다.
세상이 바뀌어야 떳떳이 업자라 불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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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이기의 역설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말했다. 길들이고 사귀고, 둘만의 역사를 쌓아 친구가 되는 거라고.
그런데 현실에서는 어떨까?
세상에 길들여져야 하는가, 세상을 길들여야 하는가?
어린왕자는 장미의 오만함과 어리석음을 고쳐주려 b612호를 떠났다가 여우를 만났다. 나는 곰을 만날까 두렵다. 아니, 이미 만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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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라는 이름의 행성
에어컨을 틀었더니 작업실이 시원해졌다.
어린왕자의 장미는 여전히 오롯하지만, 내 장미는 전기세를 낸다. 이게 현실이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좋은 말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는 밥을 먹고살 수 없다.
그래도 가끔은 b612호 같은 곳에서 살고 싶다. 장미 하나만 돌보면서, 화산 두 개만 청소하면서, 바오바브 나무 새싹만 뽑아내면서.
하지만 현실의 b612호에서는 장미도 유지비가 들고, 화산도 가스비가 나오고, 바오바브 나무 제거에도 인건비가 든다.
천수답에서 제사장이 쓴다.
P.S. 그래도 어린왕자를 읽을 때만큼은 업자도 디자이너도 아닌, 그냥 한 사람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