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29. 1:58
# 남의 하늘에 붙어살며
겉으로는 날카롭고 굳어 보인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속은 한없이 물렁하다.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외양과 내면의 간극이 이토록 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살면서 끊임없이 확인하고 있다. 사사로운 일로 남과 언성을 높여 다퉈본 적이 없다. 이것이 미덕인지 결함인지는 모르겠다.
그리 자위해 본다고 썼지만, 자위라는 말이 적절한지 의문이다. 자위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일인데, 나는 과연 나를 위로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변명하고 있는 것일까.
문득 깨달은 것은 나에게 언성을 높여본 기억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상하다. 살아오면서 한 번도 크게 화를 내본 적이 없다니. 이것이 성숙함인가, 아니면 감정의 부재인가.
내가 가장 꺼리는 일은 내 이론을 내세워 남과 토론하는 것이다.
토론이라는 행위에는 어떤 폭력성이 있다. 자신의 논리로 상대를 설득하거나 굴복시키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나는 그런 의지 자체를 갖지 못한다. 아니, 갖기를 거부한다. 무슨 일에나 중립이기를 희망한다. 중립은 안전하다.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으면 어느 쪽에도 상처받지 않는다.
과연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이런 삶이 지속 가능한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삶을 지속하고 싶은가 하는 것이다. 전자에 대한 답은 '모른다'이고, 후자에 대한 답은 '그렇다'이다.
비록 남의 하늘에 붙어살고는 있지만.
남의 하늘. 이 표현이 내 상황을 정확히 요약한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 하늘을 가져본 적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의 하늘 아래 있었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것이 슬픈 일인가? 잘 모르겠다. 슬프다고 느끼기에는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라는 것이 단 한 가지 있다. 원컨대 삶이 되도록 무의미하지 않기를.
무의미하지 않기를. 이것은 의미 있기를 바라는 것과는 다르다. 의미 있는 삶이란 너무 거창하다. 나는 그저 완전히 헛되지만은 않았으면 한다. 내가 살았다는 흔적이, 내가 여기 있었다는 증거가 어딘가에 남았으면 한다.
나는 무슨 일에나 중립이기를 희망한다. 중립적이어서, 그리고 냉담하여 상대들에게 상처를 준 적이 종종 있다.
이것은 아이러니다.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중립을 택했는데, 오히려 그 중립이 상처가 된다. 무관심이 때로는 적대보다 더 아프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중립을 택한다. 이것이 나의 한계이자 나의 방식이다.
미안한 일이다.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미안함으로 상처가 치유되지는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나는 진심으로 한 올의 악의라도 가지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악의가 없다는 것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이것만은 말하고 싶다. 나는 누구를 해치려는 마음으로 살지 않는다. 다만 나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으로 살뿐이다.
남의 하늘에 붙어살며.
이 문장을 반복하는 것은 체념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수용 때문이다. 내가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내가 생겨먹은 게 원래 그런 것이다.
이것은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다. 사람은 각자 타고난 성향이 있고, 나는 이런 성향을 타고났다. 이것을 바꿀 수 있는가? 바꿔야 하는가? 잘 모르겠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나이고,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천수답에서 비를 기다리는 제사장.
나는 그런 제사장이다. 메마른 땅에서 은총을 기다리는 사람. 비가 언제 올지 모르지만, 그래도 기다린다. 기다림 자체가 하나의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평안하시길.
나도 평안하고 싶다. 아니, 이미 평안한 지도 모르겠다. 이런 일상이, 이런 마음이 나에게는 평안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