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적 유전자

2012. 3. 13. 11:06

# 이기적 유전자



대강의 작업을 접고 나주를 다녀왔다.


지인의 장례식이었다. 나주는 생판 처음이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땅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수년의 직장 생활 동안 전국 곳곳을 누비며 살았건만, 유독 전라도만은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는 것이.


전주와 나주를 일컬어 전라도라고 한다. 호남평야의 젖줄이 흐르는 땅, 예로부터 예향이라 불리던 곳. 그런데 참으로 전라도는 나와는 유독 인연이 없었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피해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곳이 품고 있는 역사의 무게 때문에.


무등산을 오르고, 금산사와 소쇄원을 거쳐, 금남로를 걸었던 그들. 학창 시절 우리가 그토록 동경하고 부러워했던 그 모든 것들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을까. 아니,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까.


"민중"과 "자유"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불렸던 그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 우리의 청춘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결국 씁쓸한 비겁자만이 홀로 남았다. 다만 용기가 없었을 따름이다. 타인보다 나를 더 사랑했을 따름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다면 변명이 될까. 다윈이 말한 적자생존의 법칙,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이기적 유전자의 발현이라고 한다면 면죄부가 될까. 아니다. 알면서도 선택한 것이기에 더욱 부끄럽다.


공대 노래패에서 청주교도소로의 면회는 그저 비겁자의 자괴감을 달래기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했다. 진정한 연대의식이 아니라 양심의 가책을 덜어내기 위한 최소한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나는 민중을 위한 마음을 가질 수 없었다. 진정한 애민의 정신을 가질 수도 없었다. 내 유전자는 지극히도 이기적이었다. 생존 본능이 모든 이상을 압도했다. 나 자신과 내 가족의 안위가 무엇보다 우선했다.


그 때문에 나는 그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함이었다. 자괴감이었다. 그의 순수함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그에게 해줄 것은 없었다. 단지 자책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때 나에게는 소위 백골단이 두려웠다.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되는 전투경찰들 말이다.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감당했을 그 학생들 앞에서 곤봉을 휘둘렀을 그들. 단지 그들은 그곳에 있었고, 단지 나는 이곳에 있었다. 그 거리가 나를 구원했지만 동시에 나를 비겁자로 만들었다.


매캐한 최루가스가 두려웠다. 매운 연기에 눈물을 흘리며 뛰어다니는 학생들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도 나는 안전한 곳에 머물러 있었다. 난무하는 쇠파이프와 던져진 보도블록이 무서웠다. 피가 흐르는 머리를 감싸고 쓰러져가는 동료들을 보면서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보도블록 대신 칼라아스팔트가 깔리기 시작한 것은. 시위대가 던질 돌멩이마저 빼앗아버리려는 치밀한 계산이었다. 권력은 그런 식으로 저항의 도구마저 차단해 나갔다. 역사는 그렇게 흔적을 지워나간다.


역한 석유 냄새. 화염병에서 풍기는 그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남아 있다. 나는 가끔 주유소에서 구토를 한다. 그때의 트라우마일까. 참 가지가지도 하다. 몸이 기억하는 두려움이란 것이 이런 것인가 보다.


이는 다만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지 못한 자의 변명일 뿐이다. 하지만 변명이라도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이라는 것이 이런 것일 터이다.


님들의 돌팔매질은 지금 친구의 영전을 보고서 쫓기듯 빠져나온 나에게는 차라리 축복이리라. 비난받을 자격도 없는 자에게는 돌팔매질조차 과분한 관심이다.


그도 나와 같이 딸이 둘이다. 검은 상복을 걸친 형수님을 보면서 생각했다. 어찌 감히 고인의 부인을 제수씨라 부를 수 있을까. 그는 이제 역사가 되었고, 그의 아내는 역사의 증인이 되었다.


어린 조카들을 보면서 무력감에 빠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도. 그가 살아 있었을 때나 그가 고인이 되었을 때에도. 돈을 주는 것? 그것으로 무엇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말을 하는 것? 무슨 말로 그 상실을 달랠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조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저 행복하길 평안하길 하나님께 빌었다. 냉담자로 살아온 시절이 문득 아쉬웠다. 이럴 때 기댈 신앙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때 동지라 불리던 그들과 나. 삶의 간극은 어느덧 너무도 깊었다. 너무도 세상을 알아버린 나와 너무도 세속을 알아버린 그들. 모두가 변했지만 변화의 방향이 달랐다. 나는 현실에 굴복했고, 그들은 현실에 매몰되었다.


피하듯 쫓기듯 올라오는 길 위의 상념. 그 순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마음은 과연 진실했을까. 과연 절실했을까. 아마도 순간성의 진실에 불과했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느끼는 일시적 경건함 같은 것.


나는 여전히도 성당을 갈 수가 없고, 여전히도 냉담자로 살아가겠지. 내가 죽을 만큼 힘들었을 때에도 하나님께 도와달라 기도할 수 없었다. 차라리 날 죽여달라고, 차라리 저 찬란한 아침해를 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을지언정. 그것이 내 믿음의 한계였다.


추억을 곱씹으려 한다. 무용담과 안타까움으로 점철된 그 시절의 기억들을. 우리에게는 그때의 그 삶이 있었다. 그 치열하기만 했고 찌는 듯한 그 더위, 그 화염 열기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던 시절이. 차라리 전쟁터였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 삶을 함께했던 동지들. 치열히 살자 다짐했던 맹서는 어디로 갔는가. 혁명을 꿈꾸던 청년들은 어디로 갔는가. 이제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추레한 중년의 아저씨들뿐이다. 배 나온 가장들, 대출에 시달리는 샐러리맨들, 승진에 목매는 직장인들.


하지만 "형"만은 그리 살아오지 않았다. 끝까지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온 사람이었다. 한 번도 나를 비난하지도, 그렇다고 위로하지도 않았다. 항상 사람 좋은 웃음만 보여주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는 그 웃음이 버거웠다. 차라리 비난이었으면, 차라리 악의였으면 지금 이리도 마음이 답답하지 않았을 텐데. 그의 관용이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용서받지 못한 자보다 용서받은 자가 더 괴로운 법이다.


그의 죽음은 지방신문에조차 실리지 않았다. 한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사람의 죽음이 이토록 조용할 수 있는가. 그 치열한 삶을 기억해 주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후일 조카들에게는 그 증언자가 되어주리라. 그 증거가 되리라.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의무일 것이다.


나는 오늘도 이 이기적인 유전자를 끌어안고 치열하게 살아갈 것이다. 그의 길과는 다른 길을. 내 가족과 내 아이의 행복만을 위해서.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이기적 유전자"는 결국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려는 맹목적 충동. 나 역시 그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다. 그것이 비겁함이라면 비겁함이고, 현실이라면 현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 앞에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가 끝까지 지켜낸 어떤 것을 나는 포기했다는 사실 앞에서. 그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할지라도.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본능을 거스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이기적 유전자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진 존재다. 그런데 나는 그 의지를 발휘하지 못했다. 아니, 발휘하려 하지 않았다.


영화 '존 큐'의 주인공이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하던 말이 생각난다. "돈도 많이 벌어. 남을 배신하더라도. 아빠처럼 바보같이 살지 마. 돈이 있으면 모든 게 다 쉬워."


현실은 그렇다. 이상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그리고 나는 현실을 택한 사람이다. 그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부끄러워할 뿐이다.


부디 평안하길. 또한 이 글을 읽는 여러 님들도. 또한.


오늘은 빗물 들어도 쑥물 든 제사장이다.


며칠이 지난 일을 이제야 쓰는 것은 이제는 조금 진정이 되었고, 시대의 아픔을 함께한 한 지인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기 위함이다. 그를 기억하기 위함이다. 너무 늦었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하지만 때로는 패자의 기록이 더 진실에 가깝다. 그의 삶이 패배였다면, 나는 그 패배를 기록하는 자가 되겠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오후의 낙엽 태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