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바램 』2"/2

하편: 새로운 건축

by leehyojoon ARCH

바램 - 하편: 새로운 건축


그렇게 다시 시작된 우리의 관계는 이번에는 완전히 달랐다. 연인에서 친구로. 그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건축이었다. 더 넓고, 더 자유로우며, 더 많은 창문이 있는 공간.


처음에는 어색했다. 서로 어떤 거리를 유지해야 할지, 어떤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새로운 관계의 규칙들을 만들어갔다.


만나는 횟수도 줄었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그것도 여러 사람이 함께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문자나 전화는 오히려 더 자주 주고받게 되었다. 연인일 때의 무거움 없이, 가벼운 안부와 농담들을 나누었다.



서로의 연애상담사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연애상담을 해주게 되었다. 이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녀가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귀면 나에게 이야기했고, 내가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면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이번 남자는 어때?"


"괜찮아. 너랑 달라. 더 로맨틱해."


"그래? 다행이네."


이상한 대화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연스러웠다. 질투나 소유욕 없이도 서로를 아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배워가고 있었다.


그녀의 새 남자친구는 같은 과 선배였다. 건축사사무소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안정적이고 성실한 타입이라고 그녀가 말했다.


"너랑은 정말 다른 사람이야."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다른데?"


"더 차분하고, 계획적이고. 그리고 질투를 안 해."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부족했던 부분들을 그 사람이 채워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그녀가 더 행복해 보인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내 쪽에도 새로운 만남이 있었다. 같은 과 후배였는데, 문학을 좋아하고 조용한 성격의 여자였다. 그녀와는 책 이야기를 많이 했다.


"어떤 사람이야?" 그녀가 물었다.


"조용하고 차분해. 너랑 비슷한 면이 있어."


"나랑 비슷하다고? 어떤 면에서?"


"생각이 깊고, 말을 신중하게 하고. 그리고 자신만의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해."


그녀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좋겠네."



이별의 축하

우리는 서로의 이별도 지켜봤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별하면 서로 축하해주기도 했다.


"넌 이젠 자유인 거야!"


"한 동안 내 거 하자."


그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웃음 속에는 씁쓸함도 있었지만, 동시에 해방감도 있었다.


그녀의 첫 번째 이별은 6개월 만에 왔다. 상대방이 먼저 이별을 제안했다고 했다. 성격 차이 때문이었다.


"괜찮아?" 내가 물었다.


"응, 괜찮아. 사실 나도 좀 지쳤거든."


"왜?"


"너무 완벽하려고 하는 사람이었어. 모든 걸 계획하고, 예측하려고 하고. 가끔은 즉흥적인 것도 필요한데."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안정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변화를 갈망하는 모순적인 사람.


내 쪽의 이별은 더 조용했다. 서로 자연스럽게 연락이 줄어들다가 끝났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감정이 식었을 뿐이었다.


"어떻게 끝났어?" 그녀가 물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연락이 줄어들고, 만나는 횟수도 줄어들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연인이 아니라 그냥 아는 사람이 되어 있더라고."


"그런 이별도 있구나."


"응. 드라마틱하지는 않지만, 나름 평화로워."



새로운 패턴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연애를 경험하고, 이별을 겪고, 다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패턴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서로에게 이야기했다.


신기한 것은 이런 관계가 생각보다 편안했다는 것이었다. 연인일 때는 서로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많았지만, 친구가 되고 나서는 그런 부담이 없었다. 상대방의 행복을 순수하게 바랄 수 있었다.


"우리 참 이상한 사이야." 어느 날 그녀가 말했다.


"어떻게 이상해?"


"연인이었다가 친구가 되고, 서로 연애상담까지 해주고. 보통은 이렇게 안 되잖아."


"그러게. 근데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응, 나도 그래. 오히려 더 편해."


우리는 그런 관계를 몇 년간 유지했다. 각자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도 꾸준히 연락했다.



목소리라는 선물

그리고 오늘, 그녀가 노래를 불러서 보내준 것이다. 노사연의 "바램"이라는 곡이었다.


내 손에 잡은 것이 많아서 손이 아픕니다


그 가사를 들으며 나는 내 손을 바라봤다. 정말로 아픈 것 같았다. 요즘 너무 많은 것을 붙잡으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취업 준비, 미래에 대한 걱정, 혼자라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온몸을 아프게 하고


그녀는 내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인일 때보다 친구가 되고 나서 오히려 더 세심하게 나를 살펴보는 것 같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노이즈가 사라지고 나니, 순수한 관심과 배려만 남은 것이다.


내가 힘들고 외로워질 때 내 얘길 조금만 들어준다면


목소리는 가장 개인적인 건축 재료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공간을 채우고, 기억을 만들고, 감정을 전달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내 안의 공허한 공간을 조금씩 채워주고 있었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이 가사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사람은 늙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지고, 더 진해지고, 더 단단해지는 것.


그녀와 나는 각자의 방식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연인에서 친구로, 그리고 이제는...



마지막 만남

그로부터 일주일 후, 그녀가 만나자고 했다. 오랜만에 둘이서만 만나는 것이었다.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평소보다 단정한 옷차림이었다. 흰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바지. 머리도 평소보다 정갈하게 묶었다.


"무슨 일이야?"


"말하고 싶은 게 있어."


카페 안은 따뜻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진지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의 표정이었다.


"결혼하기로 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카페 안의 모든 소리들 - 커피머신 소리, 사람들의 대화 소리, 의자 끄는 소리 - 이 모든 것이 갑자기 멀어졌다.


"언제?"


"올 가을에. 12월쯤."


"그 사람이야?"


"응. 작년부터 사귄 그 사람."


나는 그 남자를 알고 있었다. 건축사사무소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몇 번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다. 안정적이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했다.


"잘됐네. 축하해."


"고마워."


그녀는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했던 것 같았다.


"정말 좋은 사람이야.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거든."


"그럼 정말 다행이고."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서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침묵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응?"


"미안해. 앞으로는 연락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그 말의 의미를 나는 알고 있었다. 결혼을 앞둔 그녀에게 나 같은 과거의 연인은 불필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도.


"알겠어. 충분히 이해해."


"정말 고마웠어. 이런 친구로 지낼 수 있어서."


"나도 고마웠어."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슬픔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시대가 끝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완공

그날 밤, 나는 다시 그 노래를 들었다. 그녀가 직접 불러준 "바램"을.


저 높은 곳에 함께 가야 할 사람 그. 대. 뿐. 입. 니. 다


그녀는 이제 다른 사람과 함께 새로운 건축을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혼자서 내 공간을 만들어갈 것이다.

나는 마지막 문자를 보냈다.


"행복해.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고마웠어. 모든 게."


곧 답장이 왔다.


"너도 행복해. 꼭. 그리고 나도 고마웠어."



새로운 설계도

창밖으로 저녁 빛이 들어왔다. 오렌지색에서 보라색으로 변해가는 하늘. 루이스 칸이 말했듯이 빛은 공간을 정의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 방은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되었다.


그녀와 함께 만들었던 모든 공간들이 이제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 연인으로서의 공간, 친구로서의 공간, 그리고 이제 추억으로서의 공간. 우리는 세 번의 다른 건축을 경험했다. 각각 다른 재료와 다른 설계도를 가진 건축물들이었다.


사람은 버리는 게 아니다. 다만 각자의 설계도대로 짓고, 각자의 속도로 완성해 가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새로운 건축가와 함께 새로운 건물을 짓기 시작할 것이다. 더 튼튼하고, 더 아름답고, 더 오래갈 수 있는 건축물을.


나는 혼자서 내 공간을 계속 만들어갈 것이다. 더 넓고, 더 자유로우며, 더 많은 빛이 들어오는 공간을. 언젠가는 그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여도 괜찮다. 혼자라는 것이 외로움을 의미하지는 않으니까. 오히려 자유로움을 의미할 수도 있고,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할 수도 있다.


나는 그녀가 불러준 노래를 다시 들었다. 그 목소리 안에는 우리가 함께 보낸 모든 시간이 담겨 있었다. 첫 만남의 어색함, 연애의 달콤함, 이별의 아픔, 친구가 되는 과정의 신중함, 그리고 마지막 인사의 따뜻함까지.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그렇다. 우리는 익어가고 있다. 더 깊어지고, 더 진해지고, 더 단단해지면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모든 경험들이 우리를 더 완전한 존재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휴대폰을 끄고 나는 창가에 서서 도시의 야경을 바라봤다. 수많은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불빛들 하나하나에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 각자에게는 이야기가 있다. 사랑의 이야기, 이별의 이야기, 만남의 이야기, 그리움의 이야기.


내 이야기도 그중 하나다. 특별하지도 않고, 평범하지도 않은, 그냥 하나의 이야기. 하지만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이야기.


그것이 나의 바램이었다. 완성되지 않은 건축물에 대한, 아직 들어오지 않은 빛에 대한, 그리고 앞으로 만날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갈 새로운 공간에 대한.


밤이 깊어갔다. 하지만 나는 잠들고 싶지 않았다. 이 순간, 이 기분, 이 생각들을 조금 더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마치 좋은 건물을 처음 봤을 때 그 감동을 오래 기억하고 싶은 것처럼.


내일이 되면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가는 하루가. 그리고 언젠가는 오늘 이 순간도 추억이 되어 내 안에 쌓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남겨준 목소리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 목소리 안에 담긴 모든 시간들과 함께.


내가 힘들고 외로워질 때 내 얘길 조금만 들어준다면 어느 날 갑자기 세월의 한복판에 덩그러니 혼자 있진 않겠죠


혼자 있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녀는 이제 내 곁에 없지만, 그녀가 남겨준 것들이 있다. 추억도, 교훈도,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용기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오후 7시 59분. 노사연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저녁.

뜨거웠던 골방을 벗어나며.

2015년 6월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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