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편: 설계도
카톡 알림이 울린 것은 오전 여덟 시 삼십 분이었다. 휴대폰 진동이 나무 탁자를 타고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 나는 여전히 반쯤 잠든 상태로 스크린을 확인했다.
그녀가 보낸 음성 메시지였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작고 어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노래였다. 잘 부르지는 않았지만, 정성스럽게 한 구절 한 구절 따라 부른 목소리가 아침 공기를 채웠다.
나는 전화를 걸었다.
"너 어디 아프냐? 웬 랩이냐?"
"죽을래?" 그녀가 웃었다. "헤헤. 오늘 하루 행복해라."
통화가 끝난 후에도 그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었다. 마치 공간 안에 머물러 있는 잔향처럼.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교 중앙도서관 계단이었다. 회색 콘크리트 위로 쏟아진 햇빛 사이에서, 그녀가 떨어뜨린 책을 주워주면서 시작된 인연이었다.
"고마워요."
그녀의 목소리는 도서관 특유의 고요함과 잘 어울렸다. 낮고 부드러웠다. 책은 루이스 칸에 관한 것이었다. 건축학과 학생이었던 것이다.
"건축 공부해요?"
"네. 이 학년이에요."
나는 그 순간을 기억한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그녀의 짧은 머리카락 끝을 비추던 모습을. 빛은 언제나 공간을 정의한다. 칸이 말했듯이, 공간은 빛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그다음 주에도 우리는 마주쳤다. 우연이었다. 그다음 주에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 우연이 일어났을 때, 나는 그녀에게 커피를 마시자고 제안했다.
"시간 있으면 커피 한 잔 할까요?"
"좋아요."
도서관 근처의 작은 카페였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우리는 처음으로 긴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건축을 공부하지만 실제로는 음악을 더 좋아한다고 했다. 특히 재즈를 좋아했다. 나는 문학을 전공하지만 건축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건축과 문학은 비슷한 점이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둘 다 공간을 만드는 일이니까."
"어떤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사람들이 편안해하는 공간.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공간."
그 대화가 끝나고 우리는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날부터 우리는 서로를 의식하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마주칠 때마다 눈인사를 나누었고, 가끔은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그녀와 본격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가을이었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캠퍼스에서, 우리는 자주 산책을 했다. 건축학과 건물 앞을 지날 때마다 그녀는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저 건물 봐요. 콘크리트 건물인데도 따뜻해 보이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창문의 비율 때문이에요. 그리고 빛이 들어오는 방향도. 건축가가 사람을 배려해서 설계한 거예요."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건물들이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누군가의 의도와 감정이 담긴 작품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작품들이 우리의 일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어느 날 저녁, 우리는 학교 뒷산에 올라갔다. 도시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수많은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예쁘네요." 내가 말했다.
"네. 하지만 저 불빛 하나하나에는 사람이 살고 있어요.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죠."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가끔 궁금해요. 저 사람들은 자신의 공간에서 행복할까? 아니면 그냥 살아가고 있는 걸까?"
"당신은 어때요? 지금 행복해요?"
그녀가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
"지금은 행복해요."
그때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전해지는 따뜻함. 손바닥의 약간 거친 질감과 엄지손가락의 부드러운 움직임.
"이렇게 하면 안 되나요?"
"되죠. 당연히 되죠."
연애라는 것은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건축물 같았다. 매일매일 새로운 벽돌을 쌓아 올리고, 창문을 내고, 문을 만들어가는 작업. 그녀는 세심한 설계자였고, 나는 성급한 시공자였다.
겨울이 되자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그녀의 작은 원룸에서 함께 보낸 저녁들이 늘어났다. 원룸은 작았지만 그녀만의 공간이었다. 벽에는 유명한 건축물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고, 책상 위에는 설계 도구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좁지 않아?" 내가 물었다.
"아니에요. 필요한 것들만 있으면 되거든요. 르 코르뷔지에가 말했잖아요. 주거는 거주하는 기계라고."
"그럼 이 방은 당신이라는 사람을 위한 기계인 거네요."
"맞아요. 그리고 지금은 우리 둘을 위한 기계고요."
우리는 그 작은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히터가 내뿜는 따뜻한 바람, 인스턴트커피의 쓴 냄새, 창밖으로 들리는 자동차 소리들. 모든 것이 우리만의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이었다.
그녀는 요리를 잘했다. 작은 가스레인지에서 만들어내는 소박한 음식들이지만, 언제나 따뜻하고 맛있었다. 우리는 그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하루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오늘 교수님이 그러시더라. 건축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아무리 아름다운 건물이라도 사람이 불편하면 실패작이라고."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우리 관계도 그런 것 같아요.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서로가 불편하면 안 되는 거죠."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동시에 막연한 불안감도 느꼈다. 우리가 서로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을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도 이 편안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봄이 되면서 우리 사이에 작은 균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질투가 심해진 것이다. 내가 다른 여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표정이 굳어졌고, 여자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 늦게 들어오면 말을 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의심해? 난 너밖에 없다고."
"알아. 근데 그래도 신경 쓰여."
그런 대화를 나눌 때마다 우리 사이의 공간은 조금씩 좁아지는 것 같았다. 벽이 두꺼워지고, 창문이 작아지고, 빛이 차단되는 느낌.
어느 날 밤, 우리는 심하게 싸웠다. 내가 과 선배와 함께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왔는데, 그 선배가 여자였던 것이다. 별일 아니었지만 그녀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
"깜빡했어. 정말 별일 아니었는데."
"별일 아니면 왜 말하지 않은 거야?"
그날 밤 그녀는 울었고, 나는 화가 났다. 왜 이렇게 작은 일로 싸워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싸움이 반복된다면 우리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이별은 벚꽃이 흩날리던 4월의 어느 날 왔다. 캠퍼스 벤치에 앉아서 그녀가 말했다.
"우리 너무 다른 것 같아."
그때 바람이 불었다. 벚꽃 꽃잎들이 우리 사이로 흩어져 내렸다. 안도 다다오는 자연을 받아들이는 것이 건축의 본질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그 바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뭐가 달라?"
"모든 게. 생각하는 것도, 꿈꾸는 것도, 살아가는 방식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이미 결정된 일을 통보하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 순간 우리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실제로는 들리지 않는 소리였지만, 분명히 들렸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녀는 울었고, 나도 울었다. 하지만 이별은 되돌릴 수 없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모르겠어.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아무런 계획도, 약속도 없이. 그저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만 가지고.
이별 후 몇 달은 공허했다. 혼자 지내던 내 원룸은 갑자기 너무 넓어진 것 같았다. 그녀가 앉던 의자, 그녀가 두고 간 머그컵, 그녀의 향수 냄새가 배인 베개. 모든 것이 그녀의 부재를 증명하는 증거들이었다.
피터 줌터는 건축이 기억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존재가 아니라 감각과 기억의 저장고라고. 내 방은 온통 그녀의 기억으로 가득했다.
나는 그 머그컵을 치우지 못했다.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그냥 그 자리에 두었다. 마치 그녀가 언젠가 돌아와서 다시 그 컵으로 커피를 마실 것처럼.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그녀와 처음 가까워진 계절이었다. 캠퍼스의 단풍들이 다시 붉게 물들었지만, 이번에는 혼자 그 길을 걸어야 했다.
어느 날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안녕? 잘 지내?"
그 문자를 보고 한참을 고민했다. 답장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스크린의 푸른빛이 어둠 속에서 유일한 광원이었다.
"응, 잘 지내. 너는?"
"나도 잘 지내. 가끔 생각나더라."
그 짧은 문자 교환이 새로운 시작이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다시 연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연인이 아니라 다른 관계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