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한 번도 부르지 않은 이름』5"/5

작가노트

by leehyojoon ARCH

작가노트

# 《한 번도 부르지 않은 이름》에 대하여



침묵의 언어로 쓴 사랑


이 소설은 '말하지 않음'의 힘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소통하고, 표현하고, 정의 내리려 합니다.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사랑해", "보고 싶어", "함께하자"는 말들로 관계를 확증하려 하지요.


하지만 때로는 말하지 않는 것이 더 깊은 소통일 수 있습니다. 이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방의 과거와 미래, 사회적 정체성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존재만을 온전히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이기도 하고요.


언어는 때로 관계를 제한합니다. 정의하고, 범위를 정하고, 기대를 만들어냅니다. 이름이 있으면 역할이 생기고, 역할이 있으면 의무가 따라옵니다. 이 소설의 두 주인공은 그런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관계를 경험합니다.




도시적 고독과 현대적 사랑


연희동 카페, 지하철, 아파트 복도. 이런 익숙한 서울의 공간들을 통해 현대 한국인들이 경험하는 관계의 양상을 그려내고자 했습니다. 도시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지만, 동시에 가장 고독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특히 결혼 제도 안팎에서 경험하는 정서적 공백에 주목했습니다. 제도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사이이지만 정서적으로는 점점 멀어지는 부부, 그리고 그 공백을 메우려는 무의식적 욕망. 이것은 현대인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딜레마입니다.


도시의 익명성은 때로 해방감을 줍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아무런 설명 없이, 그저 현재의 감각만으로 만날 수 있는 가능성. 이 소설은 그런 도시적 만남의 한 형태를 탐구합니다.




삼각관계의 새로운 해석


이 소설에서 삼각관계는 전통적인 멜로드라마의 구조가 아닙니다. 질투나 경쟁, 선택의 서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랑과 소통 방식이 한 공간에서 마주치는 순간을 포착하려 했습니다.


남편과의 관계는 '말로 하는 사랑'을, 이름 없는 남자와의 관계는 '몸으로 하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둘 다 진짜 사랑이지만, 둘 다 불완전한 사랑이기도 하지요.


3장에서 세 사람이 복도에서 마주치는 장면은 이 소설의 핵심 순간입니다.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는 그 침묵 속에서 모든 관계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어색함, 당황, 그리고 묘한 이해. 그 순간 세 사람은 각자 다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건들이 말하는 이야기


이 소설에서 물건들은 단순한 소품이 아닙니다. 셔츠, 책, 치약, 꽃 등은 각각 관계의 흔적이자 감정의 대리인 역할을 합니다.


특히 《우리는 서로를 오해하고 있다》라는 가상의 책은 이 소설의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사랑은 완전한 이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시작된다는 역설을 담았습니다.


민트 치약 튜브 하나에도 관계의 역사가 스며있습니다. 매일 아침과 밤, 그가 이를 닦고 나와 키스했던 시간들. 그 작은 물건 안에 축적된 시간과 체온. 때로는 거대한 선언보다 작은 물건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계절의 순환과 기억의 지속


소설은 여름에 시작해서 다음 여름으로 끝납니다. 하지만 시간은 원형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흐릅니다. 같은 계절이 돌아와도 모든 것은 변해있죠.


기억은 과거 시제로 존재하지만, 때로는 현재 시제로 경험됩니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지금도 그가 자주 입던 흰 셔츠 색깔을 기억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도 현재적 감각으로 남아있다는 의미입니다.


완전히 끝나지도, 계속되지도 않는 관계의 애매함. 이것이 현대적 관계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명확한 시작과 끝이 있는 고전적 서사와 달리, 우리의 실제 관계들은 대부분 모호한 경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적 사랑의 윤리


이 소설이 불륜을 미화한다고 오해받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관계의 복잡성입니다.


결혼 제도와 개인의 욕망 사이의 간극, 소통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정서적 공백, 그리고 그 공백을 메우려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 이런 것들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주인공은 남편을 배신하지만, 동시에 자신도 배신당합니다. 이름 없는 남자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으니까요. 이것은 현대적 관계의 새로운 윤리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전통적인 도덕 기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들이 존재합니다.




몸의 언어와 마음의 진실


결국 이 소설은 언어의 한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말로 표현하려 하지만, 정작 가장 깊은 감정들은 말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주인공과 이름 없는 남자 사이의 관계가 순수했던 이유는 언어로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름도, 약속도,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이, 오직 현재의 몸과 감각만으로 만나고 헤어졌죠.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의도나 계산 없이, 순간의 진실만을 표현합니다. 반면 언어는 때로 진실을 가리거나 왜곡하기도 합니다. "사랑한다"는 말과 실제 사랑의 감정 사이에는 종종 거리가 있습니다.




익명성과 친밀감의 역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는 역설적으로 가장 익명적인 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의 사회적 정체성, 과거의 이력, 미래의 계획을 모를 때, 우리는 오히려 그 사람의 본질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선입견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직업도, 학력도, 가족관계도 모르는 상태에서 만나는 두 사람. 그들 사이에는 오직 지금 이 순간의 화학작용만이 존재합니다.


물론 이런 관계는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덧없음이 오히려 순수함을 보장하기도 합니다. 계산이나 이해관계가 개입할 여지가 없으니까요.




기억의 형태


어떤 기억들은 사진처럼 선명하고, 어떤 기억들은 향기처럼 희미합니다. 이름 없는 사랑의 기억은 후자에 속합니다. 구체적인 대화나 사건보다는, 감각과 분위기로 남아있는 기억.


주인공이 기억하는 것들을 보면 흥미롭습니다. 그의 얼굴 형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셔츠의 색깔은 기억합니다. 이름은 모르지만, 입술의 온도는 기억합니다. 이것이 몸의 기억과 마음의 기억의 차이일 것입니다.




마치며


이 소설을 쓰면서 계속 떠올렸던 질문이 있습니다. '진짜 사랑이란 무엇인가?' 서로의 이름도 모르는 사이의 육체적 관계가 사랑일까요? 매일 "사랑해"라고 말하지만 진짜 소통하지 못하는 부부의 관계가 사랑일까요?


어쩌면 둘 다 사랑이고, 둘 다 사랑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모순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 못한 채 헤어진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름 없는 관계들이 때로는 이름 있는 관계들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되기도 하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새로운 형태의 사랑과 관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전통적인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 기존의 도덕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상황들. 이 소설은 그런 현대적 딜레마들을 정면으로 바라보려는 시도입니다.


《한 번도 부르지 않은 이름》은 우리 모두가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이름 없는 기억들에 대한 조용한 헌사입니다.




***


"사랑은 이해가 아니라 오해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랑을 그만둔다."


- 소설 속 가상의 책 《우리는 서로를 오해하고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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