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37번』1"/6

1편: 6월의 이어폰

by leehyojoon ARCH

# 37번

#1편: 6월의 이어폰


"We were riding the bus just the two of us, you were looking out the window..."




1. 창가


사랑은 예고 없이 온다.


그녀를 처음 본 것은 6월의 화요일 저녁이었다. 습도가 높아 공기가 무거운 날이었고, 사무실에서 설계도면을 수정하느라 평소보다 늦은 6시 47분 버스를 탔다. 자리가 거의 차서 맨 뒤편으로 향했는데, 그때 그녀가 있었다.


왼쪽 창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


첫인상은 선명했다. 어깨선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목덜미 위로 떨어진 머리카락이 에어컨 바람에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머리카락은 짙은 갈색이었는데, 빛이 닿으면 미묘하게 금빛이 섞여 보였다.


검은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소매가 팔꿈치까지 걷혀 있어서 가느다란 팔뚝의 윤곽이 드러나 보였는데, 피부는 도자기처럼 매끄러워 보였다. 첫 단추 하나가 풀려 있어서 쇄골의 섬세한 곡선이 드러나 있었고, 그곳에 작은 그림자가 고여 있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석양빛이 그녀의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코끝이 살짝 높고, 입술은 자연스럽게 붉었다. 립스틱을 바르지 않은 것 같았는데도 그렇게 선명한 색이었다. 가끔 집중할 때 아래 입술을 살짝 깨무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았다.


이어폰을 한쪽만 끼고 있었다. 오른쪽에만. 흰색 선이 귀에서 가방 안으로 이어져 있었고, 왼쪽 귀는 완전히 열려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가 음악을 들으면서도 주변의 소리에 열려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사람을 관찰하는 것에 익숙하다. 공간 안에서 사람들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어떤 시선의 방향을 갖는지 보는 것. 그녀도 그런 관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의 자세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다가 가끔 책을 읽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는 식이었다. 책을 읽을 때는 고개를 약 15도 정도 숙였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왼손 검지로 모서리를 살짝 누르는 습관이 있었다.


버스가 첫 번째 정거장을 지날 때, 그녀가 작은 한숨을 쉬는 것을 들었다. 아주 짧고 조용한 한숨이었지만, 내 귀에는 선명하게 들렸다. 마치 하루의 무게를 내려놓는 소리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끝없이 이어진 버스 안에서 그녀와 나는 마주 보고 앉아 있었고, 창밖으로는 똑같은 풍경이 무한히 반복되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창에 무언가를 써 내려갔지만, 나는 그 글씨를 읽을 수 없었다. 깨어났을 때 나는 공허함을 느꼈다.





2. 온도의 기억


다음 날, 나는 의도적으로 같은 시간의 버스를 탔다.


그녀는 거기 있었다. 같은 자리에, 같은 자세로. 이번에는 회색 캐시미어 카디건을 입고 있었고, 머리를 낮게 묶었다. 목덜미가 완전히 드러나 보였는데, 아주 가느다란 목덜미였다. 세 번째 경추 부분에 작은 점이 하나 있었고, 그 아래로 목과 어깨를 잇는 부드러운 곡선이 이어졌다. 카디건의 V넥 라인을 따라 목의 우아한 선이 드러나 있었다.


그녀에게서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났다. 플로럴 계열이었지만 너무 달지 않은, 비 온 후 정원에 남은 꽃향기 같은 냄새였다. 가까이 앉을 때마다 그 향기가 미묘하게 전해져 왔다.


공간에는 질서가 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녀에게는 자신만의 질서가 있었다.


그녀가 책을 읽는 방식 - 한 페이지를 다 읽고 나서 잠시 창밖을 보다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것. 마치 각 페이지가 하나의 방이고, 창밖을 보는 순간이 복도를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이어폰의 음량 - 아주 작게 틀어놓아서 가끔 새어 나오는 멜로디가 클래식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바이올린 선율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가방에서 물건을 꺼낼 때의 손동작 - 항상 오른손으로 지퍼를 열고, 왼손으로 물건을 찾는 것. 마치 설계된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무심코 거리를 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직업병일까.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는 정확히 1.2미터였다. 대화하기에는 가깝고, 무시하기에는 먼 거리.


세 번째 날, 그녀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무릎 위로 5센티미터 정도 올라오는 길이였고, 앉을 때 치마 자락을 정리하는 손짓이 자연스러웠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허벅지가 시트에 닿는 부분을 보았다. 피부와 짙은 갈색 원단 사이의 경계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다리를 모으고 앉을 때의 우아한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그녀의 다리는 길고 가늘었다. 발목까지 내려다보이는 라인이 아름다웠고, 검은색 로퍼를 신고 있었는데 발등의 곡선이 섬세하게 드러나 보였다. 때로 다리를 살짝 꼬고 앉을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종아리의 탄탄한 근육선이 은근히 드러났다.


버스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창가 좌석을 중심으로 반경 50센티미터 정도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 그 안에서 그녀는 완벽하게 자유로워 보였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자유란 무엇일까. 넓은 공간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일까. 그녀를 보고 있으면 후자 같았다. 그녀는 1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네 번째 날, 그녀가 스카프를 하고 있었다. 아이보리 색깔의 실크 스카프였는데, 목에 느슨하게 둘러져 있어서 바람이 불 때마다 살랑거렸다. 그 움직임이 묘하게 최면적이었다. 스카프가 목의 곡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모습이 마치 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때로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돌릴 때, 스카프 사이로 목의 부드러운 피부가 살짝 드러나 보였다. 그곳에 작은 맥박이 뛰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스카프의 질감을 상상해 보았다. 부드럽고 매끄러울 것 같았다. 마치 그녀의 목소리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분명히 그 스카프와 같은 질감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3. 사라짐


일주일이 지나자 나는 그녀의 패턴을 완전히 파악했다.


월요일에는 항상 두꺼운 책을 가져왔다. 대부분 소설이었고, 한 번은 『안나 카레니나』를 읽는 것을 보았다.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얇은 소설책이나 에세이. 금요일에는 책을 읽지 않고 창밖만 바라봤다. 마치 일주일의 무게를 정리하는 시간인 것처럼.


그녀의 옷차림에도 규칙이 있었다. 월요일은 정장 스타일의 재킷, 화요일은 블라우스, 수요일은 니트, 목요일은 셔츠, 금요일은 원피스나 자유로운 스타일. 색깔은 주로 검은색, 회색, 네이비. 가끔 베이지나 아이보리가 섞였지만 화려한 색은 없었다. 그녀만의 팔레트가 있는 것 같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녀가 창에 무언가를 써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비가 내리거나 습도가 높은 날, 창문에 김이 서리면 그녀는 오른손 검지로 유리에 글자를 썼다. 한 글자, 많아야 두 글자. 그리고 곧 그 글자는 사라졌다.


나는 그 글자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각도상 정확히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손가락 움직임으로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ㄱ'으로 시작하는 글자인 것 같았다. '그리움'일까, '기다림'일까, 아니면 '기억'일까.


어떤 날은 그녀가 창에 글씨를 쓰고 나서 작은 미소를 짓는 것을 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미소는 뭔가 비밀스러운 것이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면서 볼에 작은 보조개가 생겼다가 사라졌다. 마치 누군가와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녀가 미소 지을 때의 모습은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차분하고 신비로운 인상에서 갑자기 소녀 같은 밝음이 스며 나왔다. 그 순간 나는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새삼 깨달았다.


어느 목요일 저녁, 비가 살짝 내리는 날이었다. 그녀는 평소보다 피곤해 보였다. 책을 읽다가 자주 창밖을 바라봤고, 가끔 작은 한숨을 쉬기도 했다.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따뜻한 캔커피 두 개를 샀다. 하나는 나를 위해, 하나는... 왜 샀는지 모르겠다. 그냥 손이 가는 대로였다.


버스에 올라보니 그녀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평소보다 더 작아 보였다.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고, 손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나는 망설였다. 그리고 용기를 냈다.


조용히 일어나서 그녀 옆 빈자리에 따뜻한 커피 하나를 놓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내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잠시 커피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찾았다. 우리의 눈이 처음으로 마주쳤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녀는 커피를 양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따뜻함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작은 한 모금을 마셨다.


그것이 우리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소통이었다.


그녀는 전화를 거의 받지 않았다. 하루에 한두 번 정도 진동이 울리면 화면을 확인하고는 그냥 가방에 넣어버렸다. 급한 일이 아닌 이상, 버스에서는 전화를 받지 않은 사람인 것 같았다. 혹은 이 시간만큼은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은 것일까.


금요일에는 특별했다. 그녀는 책을 읽지 않고 오직 창밖만 바라봤다. 때로는 눈을 감기도 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그럴 때 그녀의 얼굴에는 평온한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성당에서 기도하는 사람의 얼굴처럼.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평온이란 무엇일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일까, 아니면 모든 것을 받아들인 상태일까. 그녀를 보고 있으면 후자 같았다.


어느 목요일, 그녀가 책을 읽다가 깊은 한숨을 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책을 덮었다. 표지를 보니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였다. 그녀는 한참을 그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날 그녀의 옆모습이 유난히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약간 내린 어깨선, 살짝 벌어진 입술, 그리고 뭔가 결심하는 듯한 표정. 마치 어떤 결정을 내리려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I never even told you, I never even tried..."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 줄은 그때 몰랐다.


그다음 주 화요일,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일정 변경이라고 생각했다. 지각을 했거나, 다른 용무가 있거나, 아니면 몸이 아플 수도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충동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녀가 내리던 정류장에서 내려보기로 한 것이다. 그녀가 어떤 곳으로 향했는지, 어떤 곳에서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곳은 주거지역이었다. 오래된 아파트들과 작은 상가들이 섞여 있는 조용한 동네였다. 그녀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어느 방향으로 갔을까. 나는 정류장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길을 따라 걸었다.


몇 분 걷다 보니 작은 서점이 보였다. '그리고 책방'이라는 간판이 걸린 아담한 서점이었다. 창문 너머로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왔고, 몇 명의 손님들이 책을 보고 있었다.


나는 문득 확신했다. 그녀가 이곳에 들렀을 것이라고. 그녀가 늘 책을 읽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그녀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서점에 들어가 보았다. 카페가 함께 있는 북카페였다. 책장 사이를 둘러보면서 나는 그녀가 어떤 책을 골랐을지 상상해 보았다. 아마 문학 코너에서 오래 머물렀을 것이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도 나는 그 서점을 생각했다. 그녀와의 유일한 접점 같은 곳. 언젠가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곳에서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같은 시간, 같은 버스를 탔다. 그녀의 자리는 비워두었다. 다른 사람이 앉으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 내 영역을 침범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 같았다.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이 버스를 타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계속 같은 버스를 탔다. 이제는 그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그 시간들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때로는 다른 여자가 그 자리에 앉기도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만의 그 고요함, 그 완벽한 균형감은 대체될 수 없었다.

"You were looking out the window, and now you're gone..."


그녀가 사라진 지 두 달째 되던 어느 날,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니, 정확히는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해 버렸다는 것을.


사랑이란 게 참 이상하다. 시작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였을까. 아니면 그녀가 이어폰을 한쪽만 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순간부터였을까. 혹은 그녀가 창에 글씨를 쓰는 것을 본 순간부터였을까.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가 사라진 후에야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마치 건물이 무너진 후에야 그 건물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깨닫는 것처럼.


나는 여전히 같은 버스를 탔다. 그리고 그녀의 자리를 바라봤다. 비어있는 그 자리가 이제는 그녀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존재한다는 것과 부재한다는 것. 그 경계가 점점 모호해졌다. 그녀는 물리적으로는 부재했지만, 감정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1편 끝*


다음 편에서는 그녀가 사라진 후의 공허함과 새로운 인물들의 등장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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