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심장 아래, 피보다 따뜻한 것 #3/6"

3편: "양을 잃은 날"

by leehyojoon ARCH

# 3편: "양을 잃은 날"

## 산문시:


「양을 잃은 날」


_그것은 잃은 것이 아니라, 떠나보낸 감각이었다.


양을 잃었다. 정확히 말하면, 양이 사라진 그 순간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어느 날 문득, 내 안에 무언가 비어 있다는 사실만을 알아챘다.


나는 양을 잡은 적이 있다. 꿈속에서, 혹은 그보다 더 먼 기억 속에서.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고요했고, 섬세했고, 아름다웠다. 그것은 잔인한 행위라기보다, 하나의 의식에 가까웠다.


그러나 양을 잃은 날에는 아무런 의식도 없었다. 칼도 없었고, 피도 없었다. 그저 '없음'이라는 감각만이, 아주 조용히, 나를 덮었다. 그 공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까지, 나는 며칠을 견뎌야 했다. 슬픔은 처음부터 명확한 형태로 다가오지 않는다.


나는 그 양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날에는, 그 이름 없는 것의 무게가 나를 짓눌렀다. 머릿속을 맴도는 건 그날의 눈빛, 심장을 움켜쥐던 손의 촉감, 피보다 따뜻했던 그 무언가였다.


어떤 상실은 기억보다 감각으로 오래 남는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체온으로, 장면이 아니라 침묵으로 떠오른다.


양을 잃은 날, 나는 처음으로 '사랑은 늘 마지막까지 남는 게 아니라 먼저 사라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건 도망간 것이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그건, 머물 수 없었던 것이다. 너무 온순해서, 너무 조용해서, 그래서 끝내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양이 남긴 자리에 손을 얹는다. 심장 아래, 피보다 따뜻했던 감정의 자리.


아무것도 없지만, 아무것도 없기에 더 선명한 그 자리에서 나는 가끔, 그 양을 다시 꿈꾼다.





***


## 소설:


#3. "양을 잃은 날"


예고된 균열


반년 동안 우리의 삶은 완벽했다. 매주 화요일 오후 세 시의 순환, 토요일 밤 재즈바에서의 만남, 그리고 우리 사이를 흘러 다니는 따뜻한 온기. 마치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고 아름다운 리듬을 찾은 것 같았다.


하지만 완벽함에는 항상 균열의 씨앗이 숨어 있다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8월 말부터 나는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을지로 4가 역 플랫폼에서 양을 기다리는 꿈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양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 꿈에서 그녀는 항상 울고 있었다. 깨어나면 그런 꿈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우리는 너무 행복했으니까.


여름이 끝나가는 8월의 어느 토요일 밤, 재즈바에서 그녀가 말했다. 얇은 면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는데, 밤바람이 차가워지기 시작해서 가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요즘 이상한 꿈을 꿔요. 양이 점점 멀어지는 꿈."


나도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답했다.


"그냥 꿈이에요."


하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 꿈들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것을. 무언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일상에서도 미묘한 변화들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심장 아래에서 느끼던 그 따뜻한 존재감이 예전만큼 뚜렷하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도면을 그릴 때도 선들이 예전처럼 부드럽게 그어지지 않았다.


동료가 내 도면을 보며 말했다.


"요즘 그림이 좀 딱딱해진 것 같은데요."


그 말이 가슴에 꽂혔다. 양이 있을 때는 내 모든 것이 부드러워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시 예전의 딱딱함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첫 번째 징조


9월 첫 번째 화요일. 우리는 평소와 같이 을지로 4가 역에서 만났다. 그녀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불안함을 보았다. 평소에는 양을 만나러 갈 때 항상 기대에 찬 표정이었는데, 그날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여름옷에서 가을 옷으로 바뀐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도 얇은 재킷을 입고 있었다.


"어젯밤 또 그 꿈을 꿨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위로의 말을 할 수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을지로 3가와 을지로 4가 사이의 터널을 지날 때, 우리는 동시에 느꼈다. 그 특별했던 감각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을.


예전에는 터널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의 밀도가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묘한 진동의 차이도, 빛의 각도 변화도 모든 것이 선명했다. 하지만 그날은 그 모든 것이 흐릿했다. 마치 라디오 주파수가 맞지 않아 잡음만 들리는 것처럼.


그녀가 내 손을 꽉 잡았다. 그녀의 손이 차갑게 떨리고 있었다.


을지로 4가 역에서 내려 플랫폼 끝으로 갔다. 양은 있었다. 하지만 예전과 같지 않았다. 더 작아 보였고, 더 투명해 보였다. 마치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는 것처럼.


처음 봤을 때 양은 달빛처럼 하얗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안갯속에 있는 것처럼 흐릿했다.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양에게 다가갔다. 평소와 같이 조심스럽게 앞다리를 감쌌다. 하지만 그 감촉이 달랐다. 예전처럼 따뜻하고 부드럽지 않았다. 더 차갑고, 더 딱딱했다. 마치 차가운 대리석을 만지는 것 같았다.


양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섬뜩한 예감을 느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점진적 상실


다음 주도 마찬가지였다. 양은 더욱 희미해졌다. 마치 오래된 사진이 바래가는 것처럼. 그녀가 양을 잡고 있는데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나도 같은 느낌이었다.


예전에는 양을 잡으면 심장 아래에서 따뜻한 온기가 퍼져나갔다. 하지만 이제는 그 온기가 희미했다.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 같았다.


9월이 깊어가면서 서울에는 가을이 왔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확연히 달라졌다. 반팔에서 긴팔로, 얇은 옷에서 두꺼운 옷으로. 그녀도 이제는 스웨터를 입고 나왔다.


세 번째 주에는 더 심각해졌다. 양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구체적인 형태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마치 물속의 그림자를 보는 것 같았다.


그녀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우리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걸까요?"


나는 답할 수 없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일상생활에서도 변화가 더욱 뚜렷해졌다. 아침에 눈을 뜰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심장 아래의 그 온기였는데,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는 그녀의 손을 잡으면 우리 사이에 특별한 온기가 흘렀다. 하지만 이제는 그냥 두 사람의 손이 닿는 것 같았다. 별다른 의미도, 특별한 감각도 없이.


그녀가 어느 저녁 내게 물었다.


"혹시 양이 우리를 떠나려고 하는 걸까요?"


사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양은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고. 우리는 반년 동안 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다. 매주 화요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 혹시 그것이 문제였을까?


"다른 곳에서 찾아볼까요?"


나는 제안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문제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절망적 탐색


10월 첫째 주부터 우리는 다른 역들을 시도해 보기 시작했다. 을지로 3가 역, 을지로입구역, 시청역. 하지만 어디에서도 양을 찾을 수 없었다.


시간도 바꿔봤다. 화요일 대신 수요일에, 오후 세 시 대신 저녁 여섯 시에. 하지만 소용없었다.


일주일 내내 우리는 서울 지하철을 헤맸다. 1호선부터 9호선까지, 모든 역을 다녀봤다. 하지만 양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양을 찾아 헤매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치던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창밖을 응시하는 대학생. 책을 읽다가 한숨 쉬는 직장인.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미소 짓는 할머니. 모든 사람이 각자의 무언가를 잃고, 찾고,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우리가 너무 욕심을 부린 걸까요?"


"무슨 뜻이에요?"


"양을 독점하려고 한 것 같아요. 사토 씨처럼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않고."


그 말에 일리가 있었다. 사토는 나에게 양을 가르쳐주고 떠났다. 하지만 우리는 양을 혼자만 가지고 있었다. 다른 누구에게도 전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양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까?




마지막 시도


10월 마지막 화요일. 우리는 마지막으로 을지로 4가 역을 찾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제 사람들은 모두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져 겨울의 전령이 오고 있었다.


플랫폼에는 평소와 같이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양을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애초에 볼 양이 없었다.


우리는 플랫폼 끝으로 갔다.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기다렸다. 한 시간, 두 시간. 하지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도 이제는 두꺼운 스웨터와 코트를 입고 있었다.


"정말 없는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양 없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양은 없었지만, 그 자리에 서 있으니 묘한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마치 양이 있었던 시간들의 잔향 같은 것이. 음악이 끝난 후에도 공기 중에 남아있는 여운처럼.


그녀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말했다.


"이상해요. 양은 없지만, 여전히 특별한 곳인 것 같아요."


정말 그랬다. 양은 사라졌지만, 우리가 함께 양을 나누었던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기억들이 이 자리를 여전히 특별하게 만들고 있었다.




빈자리의 무게


그날 밤, 우리는 재즈바에서 만났다. 하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빌 에반스의 피아노마저 슬프게 들렸다. 재즈바 안은 따뜻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코트를 벗지 않았다.


그녀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빈자리가 이렇게 큰 줄 몰랐어요."


나도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몸의 일부가 사라진 것 같았다. 물리적인 아픔은 아니었지만, 계속해서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명확해지더라고요. 뭔가 없다는 것이."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가 배어 있었다. 마치 무거운 짐을 혼자 지고 오랫동안 걸어온 사람의 피로.


나는 언제부터 그것을 느꼈는지 생각해 봤다. 아침에 일어날 때였다. 평소라면 심장 아래에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을 텐데, 그게 없었다. 마치 체온계가 고장 난 것처럼, 내 몸의 온도를 측정할 수 없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면을 그리는데 선들이 예전처럼 부드럽게 그어지지 않았다. 양이 있을 때는 모든 선이 자연스럽게 흘렀는데, 이제는 다시 각도기와 자를 사용해야 했다.


우리는 조용히 술을 마셨다. 평소와 같은 자리, 평소와 같은 음악, 하지만 완전히 다른 기분.




상실의 발견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서, 나는 뭔가 다른 것을 깨달았다. 양을 잃었는데, 그녀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양을 매개로 서로를 바라봤다. 양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매개체 없이 직접 마주 보고 있었다. 더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녀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어느 날 말했다.


"이상해요. 마치 우리가 같은 아픔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정말 그랬다. 양을 잃은 슬픔이 우리를 더 가깝게 만들고 있었다. 혼자였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텐데, 함께라서 견딜 만했다.


처음에는 양을 함께 나누었다. 이제는 양을 함께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인간적인 것 같았다.




일상의 재구성


11월이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매주 화요일 오후 세 시에 만났다. 하지만 이제는 양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양이 없는 현실을 함께 견디기 위해서였다.


서울에는 본격적인 겨울이 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두꺼운 패딩과 목도리를 두르고 다녔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을지로 4가 역에서 내려 플랫폼 끝으로 가는 것도 여전했다. 하지만 이제는 양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서 서로의 하루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냥 함께 서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양을 잃고 나니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우는 사람들, 혼자 앉아있는 사람들,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전에는 못 봤던 것들이 보였다. 아니, 보기 싫어서 외면했던 것들이 이제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벤치에 혼자 앉아 스마트폰을 보는 청년. 그의 표정에서 무언가 기다리는 듯한 간절함이 보였다.


계단에서 전화통화를 하는 중년 여성. 목소리는 밝았지만 눈가에는 걱정의 그림자가 있었다.


구석에서 책을 읽는 고등학생. 하지만 페이지는 넘어가지 않았다. 무언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우리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더 진실해진 것 같았다.




새로운 온기


한 달이 지났다. 우리는 양 없는 삶에 조금씩 적응해 갔다. 아니, 적응이라는 말보다는 받아들여갔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그녀가 어느 날 말했다.


"이상한 발견을 했어요. 양이 없어도 우리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어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이 공허함을 함께 나누고 있다는 것을. 그 상실 자체가 우리를 더 깊이 연결시켰다는 것을.


손을 잡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처럼 특별한 온기가 흐르지는 않았지만, 다른 종류의 따뜻함이 있었다. 더 인간적이고, 더 현실적인 따뜻함.


재즈바에서도 분위기가 달라졌다. 예전처럼 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대신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녀의 번역 작업, 내 설계 프로젝트, 그런 평범한 것들.


하지만 그런 평범한 대화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양이 있을 때는 항상 뭔가 특별한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부담이 없었다.




몸으로 기억하기


12월에 접어들면서, 나는 양을 잃은 것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구체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날 때가 가장 힘들었다. 눈을 뜨는 순간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심장 아래를 확인하는 것이었는데, 그때마다 빈자리를 확인해야 했다. 마치 시계가 멈춘 것을 확인하는 것처럼.


샤워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따뜻한 물이 몸에 닿을 때, 예전에는 심장 아래에서 비슷한 온기가 느껴졌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냥 물의 온도만 느껴졌다. 외부의 온도와 내부의 온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도 몸의 반응이 달랐다. 예전에는 그녀의 손을 잡으면 온몸으로 특별한 기운이 흘렀다. 하지만 이제는 그냥 두 사람의 피부가 닿는 것뿐이었다. 별다른 의미도, 특별한 감각도 없이.


처음에는 그것이 슬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어느 날 말했다.


"양이 없으니까 오히려 당신이 더 분명하게 보여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예전에는 양을 통해서 서로를 봤다. 양이라는 필터를 통해. 하지만 이제는 그런 필터 없이 있는 그대로를 봤다. 더 날것이지만, 더 진실한.




함께 아파하기


그녀가 어느 날 말했다.


"혼자라면 못 견뎠을 거예요."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양을 잃은 슬픔은 혼자 견디기에는 너무 컸다. 하지만 함께라면 견딜 만했다.


우리는 서로의 슬픔을 위로하는 법을 배워갔다. 말로 하는 위로가 아니라, 함께 있어주는 위로. 함께 침묵하는 위로.


어떤 날은 그녀가 더 슬펐고, 어떤 날은 내가 더 슬펐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상대방이 있어주었다.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어느 화요일, 그녀가 특히 그리워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처음 함께 양을 잡았던 날이 생각난다고. 나도 그날을 기억했다.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양의 앞다리를 감쌌던 순간. 양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면서 느꼈던 그 특별한 온기.


그때는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고 그녀가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잠시 침묵했다. 양이 있었던 곳을 바라보면서.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자리를. 하지만 그 침묵이 위로가 되었다. 혼자였다면 견딜 수 없었을 침묵이, 함께하니 견딜 만했다.




일상 속 빈자리들


양을 잃고 나서 가장 힘든 것은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크고 작은 빈자리들이었다.


그녀의 아파트에서 러시아 차를 마실 때. 예전에는 차를 마시면서 양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냥 차를 마셨다. 차 자체는 여전히 맛있었지만, 뭔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익숙한 음악에서 한 악기가 빠진 것처럼.


내 아파트에서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는 영화를 보다가도 문득 양이 생각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가슴 아래에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냥 영화만 봤다. 영화는 여전히 재미있었지만, 무언가 깊이가 없는 것 같았다.


한강을 따라 걸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 예전에는 강물을 보면서 양의 흐름 같다고 생각했었다. 자연스럽고 거스르지 않는 흐름. 하지만 이제는 그냥 물이었다. 그냥 흘러가는 물.


그녀가 말했다.


"예전에는 모든 것이 양과 연결되어 있었어요."


그 말이 맞았다. 양이 있을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의미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각각이 분리되어 있었다. 그것이 더 정상적인 건지도 모르겠지만, 뭔가 아쉬웠다.




기억의 재구성


겨울이 깊어지면서, 우리는 양과 함께했던 시간들을 다르게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느 날 물었다.


"그때 정말 행복했을까요?"


어려운 질문이었다. 양이 있을 때는 분명히 행복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행복이었는지, 아니면 뭔가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 때문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진짜 행복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도 나름 괜찮잖아요."


정말 그랬다. 다른 종류의 괜찮음이었다. 더 현실적이고, 더 인간적인.


"어쩌면 양이 없어진 게 아닐 수도 있어요."


어느 날 내가 말했다.


"다른 형태로 변한 거일 수도 있어요."


"어떤 형태로요?"


"우리 사이의 이 관계. 함께 슬퍼하고, 함께 견디는 이 모든 것."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양을 통해 연결되었지만, 이제는 그 연결 자체가 양이 된 거죠."




새로운 의미의 발견


연말이 다가오면서, 우리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이 경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사토 씨가 떠난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아요."


그녀가 어느 날 말했다.


사토.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뭔가 그리워졌다. 그가 남긴 체호프 책은 여전히 내 책장에 있었다. 가끔 펼쳐보곤 했지만, 러시아어를 읽을 수는 없었다. 다만 그 글자들이 주는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뿐이었다.


"양을 영원히 가지고 있으면 안 되나 봐요."


그녀의 말이 계속되었다.


"잃어봐야 진짜 가치를 알 수 있으니까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양이 있을 때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랐다.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마치 매일 뜨는 해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하지만 잃고 나니 그것이 얼마나 특별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럼 우리는 다시 양을 찾을 수 있을까요?"


"모르겠어요."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하지만 꼭 찾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왜요?"


"지금도 충분히 의미 있으니까요."


정말 그랬다. 양을 잃었지만, 그 상실을 통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상실의 의미를, 그리움의 무게를, 그리고 함께 아파하는 것의 힘을.




타인의 아픔 보기


양을 잃고 나서 가장 큰 변화는 다른 사람들의 아픔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지하철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이 다르게 보였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치던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코트 깃을 세우고 걷는 직장인. 그의 걸음걸이에서 무언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폰을 끼고 창밖을 보는 대학생. 음악을 듣고 있지만 표정은 어두웠다. 무언가 고민이 있는 것 같았다.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중년 여성. 혼자였지만 두 개의 컵을 앞에 놓고 있었다. 아마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무언가를 잃고, 찾고,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어느 날 말했다.


"우리만 양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닐 수도 있어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양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어요. 다만 그것을 양이라고 부르지 않을 뿐."


그렇다면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경험도 특별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일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무언가를 가지고, 잃고,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것.


재즈바에서도 다른 손님들이 다르게 보였다. 예전에는 우리만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특별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바 카운터에 혼자 앉아 위스키를 마시는 중년 남자. 그의 옆자리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지만, 마치 누군가를 위해 비워둔 것 같았다.


구석 테이블에서 책을 읽는 젊은 여자. 하지만 페이지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도 무언가를 잃었거나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공허함의 충만함


겨울이 끝나갈 무렵, 놀랍게도 우리는 양이 없는 상태에 완전히 적응했다. 아니, 적응이라는 말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그녀가 어느 날 말했다.


"이상해요. 양이 없는데도 충만해요."


나도 같은 느낌이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뭔가를 잃었는데, 그 빈자리가 오히려 충만함을 주고 있었다.


건축에서 빈 공간은 단순히 비어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기능이 있다. 우리가 느끼고 있는 이 공허함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공허함도 하나의 충만함일 수 있나 봐요."


내가 말했다.


"빈 공간도 공간이니까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이게 양이 우리에게 주려고 했던 마지막 가르침일까요?"


"뭐요?"


"잃는 법을 가르쳐준 거예요."


그녀의 말이 깊이 와닿았다. 우리는 지금까지 뭔가를 얻고, 가지고, 붙잡는 것에만 집중했었다. 하지만 잃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떠나보내는 의식


이듬해 2월이 되었다. 양을 잃은 지 6개월이 지난 어느 화요일, 우리는 을지로 4가 역에서 작은 의식을 치렀다. 양을 공식적으로 떠나보내는 의식.


특별한 준비물은 없었다. 다만 마음의 준비가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평소와 같이 플랫폼 끝에 섰다. 양이 있었던 그 자리에.


"양에게 감사해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마음속으로 말했다. 고마웠다고. 정말 고마웠다고.


양이 없었다면 그녀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사토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상실의 의미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양은 다른 사람들을 찾아갈 거예요."


그녀가 계속 말했다.


"우리처럼 혼자서 무언가를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그 자리에서 몇 분간 침묵했다. 양이 있었던 곳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그 순간, 마치 미풍이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양이 정말로 우리의 작별 인사를 듣고 떠나가는 것 같았다.


"이제 정말 끝인가요?"


그녀가 물었다.


"끝이자 시작이에요."


나는 답했다.


"양 없이도 함께할 수 있다는 새로운 시작."




상실 너머의 사랑


그날 밤 재즈바에서 그녀가 말했다.


"이상해요. 양을 잃었는데 더 행복해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양이 있을 때는 양을 잃을까 봐 불안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잃을 게 없어요."


그녀의 말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당신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도 잃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생각했다. 그때는 함께 잃을 것이라고. 혼자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발견한 새로운 사랑의 형태였다. 가지려고 하지 않는 사랑. 잃어도 괜찮은 사랑. 왜냐하면 진짜 중요한 것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었으니까.


"양을 잃고 나서야 알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사랑이 뭔지를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양을 통해 시작되었지만, 진짜 사랑은 양이 없어도 계속되는 것이었다. 혼자서는 견딜 수 없는 것들을 함께 견디는 것. 그게 사랑이었다.


빌 에반스의 피아노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Waltz for Debby'.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들었던 그 곡.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다르게 들렸다. 더 깊고, 더 슬프고, 더 아름답게.




새로운 차원의 관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기 시작했다. 양을 잃은 지 거의 일 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양 없는 삶에 완전히 적응했다. 아니, 적응이라는 말보다는 진화라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상실이 우리를 더 가깝게 만들었고, 공허함이 우리를 더 진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알게 되었다.


"어쩌면 이것이 사랑의 진짜 모습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녀가 어느 일요일 오후 한강을 걸으며 말했다.


"완벽할 때보다 불완전할 때, 가득할 때보다 비어있을 때 더 필요해지는 것."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실을 통해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 상실을 함께 나누는 것.


우리는 더 이상 양을 찾지 않았다. 하지만 양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서로였다.


매주 화요일 오후 세 시, 우리는 여전히 을지로 4가 역에서 만난다. 하지만 이제는 양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함께 서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토요일 밤에는 재즈바에서 만나, 그 주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한다. 평범한 일상들. 하지만 그 평범함이 이제는 특별하다.




잃음의 완성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잃지 않은 것 같아요."


어느 일요일 오후, 한강을 걸으며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양은 분명히 사라졌다. 하지만 양이 남긴 것들은 여전히 있었다. 우리였다. 우리 사이의 이 모든 것들이었다.


"그럼 우리는 정말 운이 좋았던 거네요."


내가 말했다.


"양을 가졌던 것보다, 잃을 수 있었던 것이 더 운이 좋았던 거예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잃어봐야 진짜 가진 것이 뭔지 알 수 있으니까요."


강물이 흘러갔다. 끊임없이, 자연스럽게. 마치 양이 흘러간 것처럼. 하지만 강은 여전히 있었다. 물은 흘러가도 강은 남아있었다.


우리도 그런 것 같았다. 양은 흘러갔지만, 양이 흘렀던 자리는 여전히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우리가 있었다.


"이제 우리는 아는 거죠."


그녀가 말했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언가를 함께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함께 잃어도 견딜 수 있는 것이라는 걸."


그것이 우리가 양을 잃으면서 배운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봄날의 석양이 한강을 물들이고 있었다. 연분홍빛 하늘 아래에서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다. 양은 없었지만, 우리는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잃음은 끝이 아니었다. 시작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작을 함께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실을 함께 나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우리보다 더 깊은 상실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함께 아파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끝-



***


다음 이야기 예고


새해가 되면서, 나는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양을 위한 자리가 필요하다는 생각. 공식적인 무덤이 아니라, 기억할 수 있는 조용한 자리가.


그 생각은 점점 강해졌다. 상실을 그냥 마음속에만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실제로 기억의 자리를 만드는 것.


그리고 어느 봄날, 홍대 근처 작은 공원에서 나는 그 자리를 찾았다. 아니, 만들었다. 돌 하나와 꽃 하나로.


그곳에서 우리는 만났다. 우리처럼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을. 각자의 상실을 안고, 각자의 기억할 자리를 찾던 사람들을.


그중에는 한 중년 남자가 있었다. 30년을 함께 산 아내를 2년 전에 잃었다고 했다. 소아과 의사였지만 정작 가장 소중한 사람은 구하지 못했다고 했다.


"상실을 나누는 것도 사랑의 한 형태"라고 그가 말했을 때, 우리는 알았다. 우리의 여행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4편: "이름 없는 양의 무덤 앞에서"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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