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노트 - 양을 잡는 이야기
이 작품은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잡고' 살아가는가?"
어느 날 문득, 사람들이 일상에서 '잡는다'라고 표현하는 모든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기회를 잡고, 사람을 잡고, 사랑을 잡고, 때로는 슬픔까지 잡는다. 하지만 정작 '잡는다'는 행위의 본질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양을 잡는다'는 표현이 떠올랐다. 온순하고 무력한 존재를 잡는다는 것. 그것이 폭력일까, 보호일까, 사랑일까. 이 모호함이 이 작품의 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사실 더 솔직히 말하면, 이 작품의 진짜 출발점은 2015년 7월 7일에 쓴 짧은 산문시 「온순한 양 잡기」였다. '양을 잡는다'는 표현에 매혹되어 몇 줄의 시를 썼지만, 그것을 온전한 이야기로 확장시키지 못한 채 서랍 속에 묵혀두었다.
그 짧은 산문시는 마치지 못한 숙제처럼 오래도록 나를 따라다녔다. 때로는 죄책감으로, 때로는 그리움으로. 이 작품은 그 오래된 숙제를 마침내 완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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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산문시
「온순한 양 잡기」(2015.07.07)
초원은 꿈처럼 펼쳐지고 유목민의 손끝에는 의지할 것이라고는 가축의 숨소리뿐이었다.
그중에서도 '양'은 달빛 아래 흰 구름처럼 떠다니는 귀한 존재로, 특별한 순간에만 그 생명을 거둘 수 있었다.
앞다리를 두 손으로 감싸면 양은 스르르 대지 위로 내려앉는다. 약간의 저항, 그러나 곧 체념의 정적이 흐른다.
주머니칼의 차가운 날이 앞가슴을 5센티미터 가른다. 그 틈새로 스며드는 손은 마치 꿈속을 헤엄치듯 서서히, 서서히 심장의 박동에 닿는다.
처음 가죽이 갈라질 때의 한 번의 떨림 그리고 고요.
손이 심장동맥을 움켜쥐는 순간 세상은 잠시 멈춘다. 양은 비명도 없이 사지만 한 번 떨리고 그대로 잠들어간다.
5분, 아니 6분. 시간마저 몽롱해지는 그 경계의 순간들.
만약 그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양을 쫓는 모험'은 영원히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 양이 쓰러지는 순간을 목격하고 나서 고기는 더 이상 입술에 닿지 못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섬세하고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 선명한 피의 궤적이며, 그 손놀림의 춤사위. 그 마지막 순간의 아련한 눈동자
꿈속에서...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순한 양 잡기'를 떠올린다. 그저 이상하다,
다만 다른 건 내가 즉사한다는 것뿐.
주머니칼인지 장도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내 것이 되고 내 것이 아닌 그 경계의 무엇.
꿈과 현실 사이에서 양은 여전히 온순하게 내 안에서 잠들어간다.
_제사장. 세계의 끝에서 기다리며
이 원작 시의 마지막 구절 "내가 즉사한다는 것뿐"이 5편 "내가 다시 양이 되었을 때"로 완성되기까지 9년이 걸렸다. 잡는 자에서 잡히는 자로, 사냥하는 자에서 양이 되는 자로의 완전한 전환. 이것이 이 작업의 핵심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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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두 가지 형태로 동시에 존재한다. 산문시적 에세이는 내면의 철학적 성찰을, 소설은 그 성찰이 구체적인 삶 속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보여준다.
같은 주제를 다루지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이 실험은, 독자들이 감정과 이성, 추상과 구체, 내면과 외면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였다. 산문시가 '명상하게' 만든다면, 소설은 '체험하게' 만든다.
산문시적 에세이에서는 시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언어를, 소설에서는 담담하면서도 정서적인 문체를 추구했다. 특히 대화체를 30% 이하로 제한하고 내적 독백 중심의 서술을 통해 관찰자적 거리감을 유지했다.
건축가인 화자의 시선을 통해 공간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되, 직업적 정체성을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도록 주의했다. '양을 잡는다'는 표현이 가진 언어적 중의성—소유와 해방, 폭력과 사랑, 만남과 이별—을 최대한 활용하려 했다.
각 편은 전통적 영웅서사를 내면 여정으로 전환한 구조를 따른다:
1편 - 부름과 조력자: 일상에서 벗어나 양을 잡는 법을 배움
2편 - 첫 시련과 동맹: 사랑을 통해 양을 나누며 관계를 심화
3편 - 동굴 깊숙이: 양의 상실이라는 최대 위기를 경험
4편 - 변화와 지혜: 상실을 수용하고 치유자 역할을 발견
5편 - 귀환과 완성: 양이 되어 완전한 자유와 새로운 시작을 맞음
이는 외부적 모험이 아닌 철저히 내적 여정의 형태를 취한다. 물리적 시련 대신 심리적 성장, 외부 세계 정복 대신 내면세계의 발견이 핵심이다.
1-2편의 개인적/연인 관계에서 시작하여,
3편의 상실 공유,
4편의 공동체적 치유,
5편의 보편적 존재로 확장되는 구조는 현대인의 고립에서 연대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4편에서 무덤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상실자들의 공동체는 개인적 아픔이 사회적 치유로 승화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화자 '나'는 의도적으로 직업을 명시하지 않지만 공간에 대한 독특한 감각을 통해 건축가임을 드러낸다.
32세라는 나이는 한국 사회에서 군복무, 대학, 사회경험을 거친 성숙한 현대인을 의미한다.
내몽골에서의 어린 시절 양 도축 경험은 생명과 죽음, 아름다움과 잔혹함에 대한 원형적 기억을 제공하며, 이는 전체 서사의 출발점이 된다.
그는 '공간에 민감한 현대인'으로서 물리적 구조뿐만 아니라 관계의 구조, 감정의 공간까지 읽어내는 능력을 가진다.
1편의 양을 잡는 학습자에서 5편의 양이 되는 존재로의 완전한 변화를 통해 현대인의 내면적 성장 여정을 구현한다.
사토 다케시는 지혜의 전수자이자 떠나야 하는 스승의 전형이다.
일본인 번역가라는 설정을 통해 문화 간 소통과 이해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동시에 현대인의 유목적 삶을 상징한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이름이 없다.
개별적 인물보다는 이해와 치유의 가능성 자체를 상징한다.
러시아에서의 상실 경험은 상실의 보편성을 보여준다.
그는 생명을 다루는 의사이면서 죽음 앞에서 무력했던 아이러니를 통해, 전문성과 인간적 한계의 공존을 보여준다.
개인적 상실에서 공동체적 돌봄으로 나아가는 성숙의 과정을 구현한다.
지하철 2호선은 현대인의 일상적 순환과 반복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그 속에서 발견되는 기적적 만남의 무대가 된다.
을지로 4가 역은 오래된 서울의 시간성과 현실-환상의 경계 지점으로 기능한다.
재즈바는 진정한 소통이 가능한 성소적 공간이며, 작은 공원은 도시 속에서 신성함이 자라나는 일상적 기적의 장소다.
4편의 무덤 장면은 뉴욕 9·11 추모공원 방문 경험에서 나왔다.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마이클 아라드'가 설계한 그 공간은 부재를 통해 존재를 기억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거대한 사각형의 구멍과 끊임없이 떨어지는 폭포 소리, 그리고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사람들의 추모 행위들.
하지만 작품 속 무덤은 공식적 기념비가 아닌 돌 하나와 꽃 하나로 시작되는 소박한 기억의 자리가 되었다.
개인적 상실은 개인적 방식으로 기억되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양은 순수함, 무력함, 희생을 상징하지만, 무엇보다 '잡힐 수 있는 것'과 '잡을 수 없는 것'의 역설을 담는다. 1편에서 잡아야 할 대상이던 양이 5편에서는 되어야 할 존재로 완전히 전환된다.
한국 땅에 드문 '이방적 존재'라는 설정은 자아 발견의 낯섦과 어려움을 은유한다. 내몽골에서의 어린 시절 경험은 삶과 죽음, 잔혹함과 아름다움의 공존을 보여주는 원형적 기억이다.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에서 벌어지는 환상적 경험들은 현대인의 삶이 가진 이중성을 반영한다.
지하철 터널의 양, 재즈바의 우연한 만남들은 일상 속 기적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이 조금 더 온순해지기를, 조금 더 부드러워지기를, 그리고 조금 더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특히 상실을 경험한 독자들에게는 잃는다는 것이 끝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시작일 수 있다는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양이고, 동시에 양을 찾는 사람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모두 양이 되어,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 안을 수 있을 것이다.
9년 전 "내가 즉사한다는 것뿐"이라고 썼던 그 구절이 마침내 "내가 다시 양이 되었을 때"로 완성되었다.
죽음이 아닌 변화로,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2024년 겨울, 서울에서